대기업 E사는 25일 국회를 통과한 ‘더 센’ 상법 개정안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종일 분주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2명 분리 선출이 현실이 된 만큼 자칫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 등의 타깃이 될 수 있어서다. E사의 최대주주 지분율은 13.6%(특수관계인 포함). 2대 주주인 해외 펀드(10.5%)보다 지분율이 높지만 감사위원을 선임할 때 최대주주의 의결권이 3%로 제한되고, 이사를 선임할 때 특정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집중투표제가 시행되면 현재 7명인 이사회 멤버의 얼굴이 바뀔 수 있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 관계자는 “2대 주주가 다른 주요 주주 한두 곳만 포섭해도 새로 바뀐 상법에 따라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경영권 분쟁 전쟁터 된다”
지난달 4일 1차 상법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은 데 이어 2차 상법 개정안도 통과되면서 한국의 대표 기업들이 경영권 분쟁에 휩싸일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상장사협의회는 이날 상법 개정으로 자산 2조원 이상 지주사 31개 중 25곳(80.6%)의 경영권이 불안정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최대주주(특수관계인 포함)를 제외한 2~4대주주가 연합하면 9개(29%) 지주사의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기 때문이다. 16개(51.6%) 지주사는 2~4대주주가 이사회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 204곳으로 범위를 넓혀도 분석 결과는 비슷했다. 절반이 넘는 104곳이 이사회 멤버의 3분의 1 이상을 2~4대주주 연합에 내줘야 하는 것으로 나왔다.
주요 상장사가 경영권 분쟁 리스크에 노출되는 건 강력한 대주주 견제 장치인 집중투표제 때문이다.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선임할 때 표를 한 명의 이사에게 몰아줄 수 있는 제도다. 예를 들어 주총에서 5명의 이사를 선임할 때 행동주의 펀드 등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특정 후보에게 5표를 몰아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최대주주와 뜻을 달리하는 이사들이 이사회에 진출할 가능성이 대폭 높아진다.
두 명의 감사위원 분리 선출도 이사회 구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는 감사위원회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일반 이사 선임과 분리해 감사위원으로 지정될 이사를 별도(분리 선출)로 뽑아야 한다. 분리 선출 인원은 기존 한 명에서 이번에 두 명으로 늘었다. 국회가 지난달 4일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 지분을 3%로 제한하는 1차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며 법안이 더 강력해졌다.
경영권 분쟁이 불거진 기업의 주요 주주가 여러 개의 특수목적법인(SPC)을 세워 3%씩 의결권 지분을 분산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재계 관계자는 “레저기업인 KX그룹과 경영권 분쟁을 벌인 키스톤PE가 6개의 SPC를 설립해 감사위원 선임을 관철한 사례가 있다”며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경영권 방어장치 마련 촉구재계는 이날 상법 개정안 통과로 각종 편법과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라며 글로벌 스탠더드 수준의 경영권 방어장치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한국경제인협회 등 경제 8단체는 이날 성명에서 “지난달 4일 상법을 개정한 지 한 달 만에 더 센 상법을 통과시킨 것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재계는 경영권 분쟁과 소송 리스크 증가를 우려했다. 최대주주가 자기 지분만큼 의결권을 갖지 못하는 점을 들어 주요 주주가 힘을 합쳐 주총에서 표 대결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져서다.
많은 기업이 소송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인 경영 판단을 미루거나 경영권 방어에 기업 자금을 소진하면서 경제 전반이 활력을 잃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추가 입법을 통해 경영 판단 원칙 명문화와 배임죄 개선, 경제형벌 합리화, 기업 규모별 차등 규제 해소, 인센티브 정비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