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한·일(23일), 한·미(25일) 연쇄 정상회담을 위해 23일 3박6일 일정의 순방길에 오른다. 이재명 정부 들어 이뤄지는 한·일 정상 간 셔틀외교의 시작이고, 첫 한·미 정상회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이 대통령이 강조해 온 ‘국익 중심 실용외교’의 첫 단추가 이번 양자 정상외교를 통해 끼워진다는 점에서 정부도 회담 준비에 총력전을 펴고 있다. 미국 일정에는 이례적으로 대통령실 ‘3실장’(비서실장·정책실장·국가안보실장)이 모두 동행한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은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양국 모두에 부담스러운 과거사 문제보다 미래 협력에 방점이 찍힐 전망이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까지는 아니지만 이에 근접하기 위한 협력 방안을 담은 공동성명이 채택될 것으로 예상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은 다르다. 지난 7월 말 극적인 관세협상 타결 이후 한 달여 만에 열리는 첫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 대통령에게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 확대는 물론 ‘동맹 현대화’를 내세워 주한미군 재배치, 국방 예산 증액 청구서를 들이밀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 관계자는 “실무 협의를 마치고 정상 간 회담을 하는 게 관례지만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백지’에 어떤 결과물이 담길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기자단과 만나 경제통상의 안정화, 안보 동맹의 현대화, 한·미 간 새로운 협력 분야 개척을 이번 순방의 목표로 제시했다. 위 실장은 “이 대통령이 일본과 미국을 연이어 방문하는 것은 우리 정상외교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새로운 시도”라고 했다.트럼프 '돌발 청구서' 나오나…역대 가장 불확실성 큰 정상회담
"실무협의 마치고 회담 관례지만 백지에 어떤 결과 담길지 예측불가"이재명 대통령은 23일 일본 도쿄 총리관저에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 정상회담과 만찬을 하고 이튿날 곧바로 미국 워싱턴DC로 향한다. 현지 도착 다음 날인 25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첫 대면을 한다.
이번 연쇄 순방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온탕’이라면 한·미 정상회담은 ‘냉탕’에 비유된다. 한·일 정상회담이 미래 협력과 공조 강화에 방점이 찍혔다면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국가 경제와 안보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는 통상 안보 의제를 논의하게 된다. 예측이 어려운 협상 스타일인 트럼프 대통령의 압박 속에서 우리 이익을 얼마나 ‘지켜내느냐’가 최대 관건이다. 정부 관계자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살얼음판 한·미 정상회담한·미 정상회담은 지난 7월 말 타결된 관세 협상 후속 성격의 경제통상 안정화 의제와 주한미군 재배치, 국방예산 증액 같은 안보동맹 현대화 의제로 구분된다. 경제통상 안정화 의제에는 미국 측의 거센 현지 투자 압박과 에너지 구매 요구 등이 포함돼 있다. 삼성·현대자동차·SK·LG 등 국내 대기업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 맞춰 대규모 투자 보따리를 풀어놓을 것으로 예상된다. 에너지뿐만 아니라 미국산 무기 구매 논의도 이뤄질 전망이다.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22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무기가 있다”며 “이번 회담을 통해 결과로 구체화될 수 있다”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여기에 더해 쌀·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도 요구하고 있다. 지난 관세 협상에서 우리 측 대표단이 미국 통상당국의 요구를 일단 뿌리쳤지만 여전히 압박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장에서 ‘돌발 요구’를 할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위 실장은 “미국 측에서 계속해서 제기하고 있을 뿐 (개방이 어렵다는) 우리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했다.
양국 정상은 원자력발전과 조선,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첨단산업과 국방 연구개발(R&D) 협력 방안도 모색하기로 했다. 한·미 원자력협정 추가 개정 논의도 이뤄진다. ◇공동성명 채택도 미지수트럼프 대통령과 협상할 동맹 현대화 의제도 난도가 높다. 위 실장은 “북핵 미사일의 위협 증대 등으로 역내 불안정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동맹을 우리 국익에 맞게 현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미국의 요구에 일정 부분 응하되, 우리 군의 방위 태세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다.
트럼프 행정부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강조하는 기조하에서 감축 내지 재배치가 논의될 수 있다. 이 경우 주한미군 감축으로 인한 대북 억지력 약화 우려가 제기된다. 위 실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한·미동맹의 현대화는 안보가 더 튼튼해지는 방향으로의 현대화이자 한·미 연합방위 태세가 더 강화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연계된 국방예산 증액 요구도 방어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 예산을 5% 수준으로 올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한국의 GDP 대비 국방 예산 비율은 2.3%다. 위 실장은 “한·미 간 (국방 증액 문제를) 협의하고 있고, 어떤 숫자로 결과가 나올지는 얘기하기 이르다”고 했다.
민감한 의제가 물밑에서 논의되는 가운데 조현 외교부 장관은 전날 이 대통령의 일본 순방 수행을 생략한 채 미국으로 조기 출국했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가면 국내에 남던 관례를 깨고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도 미국 순방에 동행한다. 위 실장은 강 실장 동행 이유에 대해 “미국에서 협의해야 할 별도의 일정이 있다”고만 했다. 한·미 정상 간 공동성명이 채택될지도 결과를 지켜봐야 할 정도로 불확실성이 크다. 위 실장은 “공동성명 문안을 협의하는 건 사실”이라며 “어떻게 귀결될지는 조심스럽다”고 했다. ◇“日, 이웃이자 협력 파트너”한·일 정상회담은 순탄하게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과거사 문제는 언급을 최소화하면서 미래 협력 분야를 찾는 데 논의가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위 실장은 “미래 지향적 관계를 위한 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는 미국의 통상 압력과 중국의 역내 군사적 영향력 강화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차원이다. 정부 관계자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한국과 일본의 협력 필요성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했다. 위 실장은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 관점에서 새로운 전략 과제를 공유하는 기회를 이번 정상회담에서 가질 예정”이라고 했다.
한재영 기자 j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