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 마켓 데이터
중대재해처벌법(SAPA, Serious Accidents Punishment Act)이 5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 적용된 지 1년, ESG 투자자들의 관심사도 급변하고 있다. 2024년 1월 27일부터 83만7000개 기업과 800만 명의 근로자가 이 법의 적용을 받으면서 산업안전은 단순한 규제 준수를 넘어 기업가치 평가의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
한국의 산업재해 사망률은 0.39명으로, 주요 10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캐나다(0.5명)에 이어 2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이는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이 한국 기업 투자 시 추가 리스크 프리미엄을 요구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세계 3위 연기금 국민연금공단(NPS)도 이런 흐름에 맞춰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대한 투자 철회를 검토하고 있다. 국민연금공단은 752조 원을 운용하며, 연 2회 약 900개 상장사를 대상으로 13개 카테고리, 52개 지표로 ESG 평가를 실시한다. 이 중 산업안전 사고는 ‘논란 이슈’ 항목으로 별도 관리된다. 실제로 중대재해 발생 기업의 경우 즉각 신용등급 하락과 함께 기업채권 거래가 사실상 중단된다. 포스코이앤씨 회사채도 최근 장외시장에서 거래가 멈춘 바 있다.
2025년 스튜어드십 코드 개정으로 239개 기관이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대해 경영 개선 요구나 투자 철회를 할 수 있는 명시적 권한을 갖게 될 예정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공공조달 시장에서의 배제다. 기획재정부는 중대재해 발생 기업의 정부 계약 입찰을 원천 차단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연간 공공조달의 65%가 한국 공공조달 시스템(KONEPS)에서 이뤄지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상 시장에서의 퇴출을 의미한다.
국제적으로도 안전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의 기업지속가능성 실사지침(CSDDD)이 2024년 7월 발효되면서 연매출 4억5000만 유로 이상 한국 대기업은 공급망 전체의 안전관리 실태를 의무적으로 보고해야 한다. ISO 45001(산업안전보건경영시스템) 인증이 없으면 유럽 시장 진출 자체가 어려워진다.
투자자 관점에서 중대재해는 더 이상 ‘운 나쁜 사고’가 아니라 기업가치를 직접 훼손하는 구조적 리스크다. 사고 발생 시 주가는 평균 10∼20% 하락하고, 회사채 스프레드는 50∼100bp 확대되며, 리파이낸싱 비용이 급증한다. ESG 펀드와 지속가능성 지수에서 제외되면 장기 자본조달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역설적으로 이는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기업에는 기회요인이다. 주요 대기업이 최고안전책임자(CSO) 제도를 잇따라 도입하며 안전경영을 최고경영진 차원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일부 대형 그룹사는 CSO 보상을 안전 KPI(핵심성과지표)와 직접 연동했고, 임원 성과 평가에도 안전 지표를 포함하는 추세다. 특히 CSO 역할을 경험한 임원들이 주요 경영진으로 승진하는 사례가 늘면서 안전관리 경험이 경력개발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주주행동주의도 안전 이슈에 집중하고 있다. 2019년 8개에 불과하던 주주행동주의 대상 기업이 2023년 77개로 폭증했고, 이 중 상당수가 ESG 개선, 특히 산업안전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ISS, 글래스루이스 같은 의결권 자문사들도 안전 관련 주주제안에 찬성 권고를 늘리고 있다. 최근 클라이메이트 위크(Climate Week)에서도 ESG 행동주의가 중심 의제로 떠올랐고, ‘Say on Safety’ 같은 이니셔티브를 통해 기업의 안전관리 전략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반대로, ISO 45001 인증을 보유하고 선제적 안전관리 시스템을 구축한 기업은 낮은 자본비용과 안정적 주가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다. 경영자에게는 CSO 임명과 이사회 안전위원회 설치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다. 안전 KPI를 임원 보상과 연동하고, 디지털 트윈과 인공지능(AI) 기반 위험 예측 시스템에 투자해야 한다.
무엇보다 안전을 ‘비용’이 아닌 ‘투자’로 인식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투자자들은 이러한 시장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안전관리 우수 기업에 대한 포트폴리오 비중을 늘려야 할 시점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3년 차를 맞은 2025년, 한국 자본시장은 산업안전이 기업가치의 동력이라는 점이 증명되고 있다. 안전에 투자하지 않는 기업은 시장에서 투자받지 못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볼 때다.
김준섭 KB증권 ESG리서치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