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어 베테랑은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해 많은 경험과 뛰어난 기술을 겸비한 사람을 일컫는다. 스포츠에선 오랜 기간 일정 수준 이상의 경기력을 유지한 선수에게 쓰이는 표현이다. 중요도가 높은 대회,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베테랑도 바짝 긴장할 때가 있다고 한다. 새로운 별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갑자기 나타난 젊은 피의 기세에 베테랑의 노련함이 압도당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21일 경기 포천힐스CC(파72)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 2025(우승상금 2억7000만원, 총상금 15억원) 첫날 1라운드에서도 그랬다. 김민솔이 쟁쟁한 베테랑들을 제치고 강력한 우승 후보로 떠올랐다. 김민솔은 이날 보기 없이 이글 1개와 버디 8개를 몰아쳐 10언더파 62타를 쳤다. 포천힐스 코스레코드를 작성한 김민솔은 공동 2위(8언더파 64타) 김수지 이다연을 2타 차로 따돌리고 단독 선두로 1라운드를 마쳤다. ◇행운의 이글로 코스레코드국가대표 출신인 2006년생 김민솔은 2023년 항저우아시아게임 여자골프에서 유현조 임지유와 단체전 은메달을 합작하는 등 한국 여자골프의 미래를 책임질 재목으로 꼽혔다. 한때 아마추어 세계랭킹 2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김민솔은 2부 최강자로도 통한다. 지난해 7월 프로 전향 후 정규투어 시드전에서 고배를 마셔 올해 드림투어에서 프로로 데뷔했다. 드림투어에선 적수가 없었다. 그는 올 시즌 4승과 함께 상금랭킹 1위에 오르며 상금 상위 20위까지 주는 내년 KLPGA투어 시드를 사실상 확보했다.
내년에 KLPGA투어에 데뷔하는 김민솔은 이미 가능성을 보여줬다. 지난주 메디힐·한국일보챔피언십에서 첫날 공동 선두에 오르는 등 우승 경쟁 끝에 공동 3위를 차지했다. 이번 대회엔 추천 선수로 나와 또다시 우승 경쟁에 뛰어든 김민솔은 “코스레코드로 1라운드를 마쳐 기쁘다”며 “지난주 대회 등 좋은 경험이 쌓이고 있다”고 웃었다.
이날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18번홀(파5)에서 나왔다. 티샷을 279.1야드 날린 뒤 2온에 성공한 김민솔은 9m가 넘는 거리의 롱 퍼트를 떨어뜨려 이글을 기록했다. 김민솔은 “세컨드샷에서 드라이버와 우드 중 고민하다가 3번 우드를 선택했다”며 “이글을 하려고 노린 건 아닌데 퍼팅이 라인을 읽은 대로 정확히 굴러갔다”고 설명했다. ◇베테랑들의 버디 대결도 눈길베테랑들의 활약도 빛났다. 같은 조에서 버디 대결을 펼친 김수지와 이다연은 나란히 보기 없이 버디만 8개를 몰아치며 우승 경쟁에 뛰어들었다. ‘작은 거인’ 이다연은 이번 대회에서 2023년 9월 하나금융그룹챔피언십 이후 약 2년 만에 통산 9승째를 노린다. 처서(23일)가 지나면 유독 힘을 내 ‘가을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김수지는 지난해 10월 메이저 대회인 하이트진로챔피언십 이후 8개월 만에 통산 7승째에 도전한다.
베테랑들이 첫날부터 힘을 낸 건 BC카드·한경 레이디스컵의 중요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KLPGA투어 최고 상금 대회인 이번 대회는 주요 개인 타이틀의 격전지가 됐다. 김수지는 “상금 등 모든 면에서 메이저 대회나 다름없기에 욕심이 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포천=서재원 기자 jw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