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 "대주주 고통분담해야"…석화기업 '옥석 가리기' 시동

입력 2025-08-21 17:34
수정 2025-09-02 18:37
금융당국과 채권단이 석유화학 구조조정 계획이 발표된 직후 ‘금융권 공동 협약’을 체결하기로 한 것은 석유화학 기업들의 돈줄을 죄고 있는 금융권을 활용해 사업재편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다. 벼랑 끝에 놓인 국내 석화산업 생존을 위해 선제적 자구노력을 최대치로 끌어내기 위한 전략으로 분석된다. ◇“대주주 책임 다 해야”
금융위원회는 21일 3대 국책은행과 5대 시중은행 등을 소집해 ‘석유화학 사업재편 금융권 간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번 구조조정의 3대 기본 원칙으로 철저한 자구노력, 고통 분담, 신속한 실행을 강조했다. 특히 대주주와 계열기업은 책임감을 갖고 뼈를 깎는 자구노력과 구체적이고 타당한 계획, 신속한 실행으로 시장을 설득해야 한다는 방침을 전했다.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선(先) 자구노력, 후(後) 정부 지원’ 방침에 불만을 드러낸 석유화학업계를 향해 “물에 빠지려는 사람을 구해주려고 하는데 보따리부터 내놓으라는 격”이라며 “안일한 인식에 유감을 표한다”고 질타했다.

금융당국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것은 ‘가보지 않은 길’을 앞두고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다. 이번 구조조정은 부실기업이 아니라 정상기업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선제적 구조조정 사례로 꼽힌다. 정부는 중국·중동발(發) 공급 과잉, 원가경쟁력 저하 등으로 더 이상 석화산업의 수술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해 선제적 사업재편을 택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개별 기업이 아니라 산업 전반을 구조조정해야 하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했다.

앞서 정부는 현재 1470만t에 달하는 에틸렌 생산량을 업계 자율로 최대 25%(370만t)가량 줄이는 감축안을 내놨다. 하지만 업계 안팎에선 자율 감축만으로 제대로 된 사업재편이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금융당국은 채권단과 함께 업체별 감축 계획을 제출받기로 했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는 “두루뭉술한 계획으론 32조원에 달하는 익스포저(위험노출액)를 처리할 수 없다”며 “질서 있는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안이한 기업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당국, 은행권 규제 완화 검토금융당국과 채권단은 기업과 대주주의 자구노력과 사업재편 계획 타당성이 인정되는 경우 협약을 통해 지원에 나서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협약은 은행연합회 주도로 다음달 추진된다. 이후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기업은 채권단 실사를 거쳐 지원 여부가 결정된다.

연내 업체별 자구안이 마련된 뒤에는 종합 실사를 통해 옥석 가리기가 본격적으로 단행될 것으로 보인다. 대신 자구안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기존 여신 회수를 자제하기로 했다. 특히 14조원에 달하는 시장성 차입금을 해결하기 위해선 대주주 증자 등의 특단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 밖에 업종 전환을 원하는 기업엔 정책금융을 통해 자금을 공급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은행들은 구조조정 동참을 위해 여신 건전성 분류 등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은행이 내준 대출의 건전성이 부실채권으로 분류되면 자산의 20~100%를 충당금으로 쌓아야 해서다. 이 경우 은행의 고정이하여신 비율이 상승하는 등 건전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고 실적에도 부담이 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고정 이하 등급으로 건전성을 분류하면 채무조정에 나서기 어렵다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은행권 부담을 덜기 위한 규제 완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앞서 금융당국은 소상공인 금융 지원이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정리 과정에서 비조치의견서를 발급하는 방식으로 규제를 완화한 바 있다.

박재원/서형교/장현주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