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반도체법(칩스법)에 따른 보조금 지원 대가로 삼성전자와 TSMC 등 외국 기업에도 지분을 달라고 요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자국 기업인 인텔 지분 10%를 확보하기로 한 데 이어 외국 기업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19일(현지시간) CNBC 방송에 출연해 인텔 지분 10% 확보가 칩스법 보조금의 대가에 해당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면서 “(보조금을 지급해서) 미국 납세자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무엇이냐는 것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답은 지분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로이터 통신은 이와 관련해 백악관 관계자와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러트닉 장관이 인텔 뿐만 아니라 삼성전자와 TSMC, 마이크론 같은 회사에도 지분을 대가로 받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이날 보도했다.
러트닉 장관은 CNBC 인터뷰에서 지분을 확보하는 것이 경영에 간섭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제철이 US스틸을 인수할 때 미국 정부가 ‘황금주’를 가진 것을 예로 들면서 상대가 약속을 지키도록 강제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단순히 무상 지원금을 주는 게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확보해야 한다”면서 “납세자에게 합리적인 수익을 돌려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반도체 패권이 목적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반도체 기업이 자국에 투자하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한 것을 구실 삼아 외국 기업에까지 지분을 달라고 요구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중국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미국이 관세 위협을 무기 삼아 외국 기업에 대미 투자를 강요하는 것을 넘어, 사실상 경영 내용을 들여다보고 미국 기업을 키우는 데 활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중국과의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한국과 대만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형국이다.
러트닉 장관은 “초대형 기업들에게 공짜 돈을 주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면서 “국민이 기업의 몫을 확보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로이터 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러트닉 장관의 지분 확보 아이디어를 선호한다고 보도했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한국과 대만에서 반도체를 사오는 상황 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을 보여줬다. 러트닉 장관은 “대만은 미국에서 9500마일(1만5300㎞) 떨어져 있고, 중국에서는 불과 80마일(약 130㎞) 떨어져 있다”면서 “최첨단 칩의 99%가 대만에서 생산되는 상황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했다. 이어 “미국 내에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인프라와 경제적 역량을 갖추는 게 일본·한국과 맺은 협정의 일부”라고 말했다.
러트닉 장관은 국가 안보와 관련 있는 회사의 지분을 확보하는 비용에 관해 “중요한 점은 이것은 우리 돈이 아니라는 것”이라면서 일본이 제안한 5500억달러를 언급했다. 그는 “일본이 5500억달러 규모의 투자기금을 약속했고, 한국이 추가로 3500억달러를 내기로 했다”면서 “그 9000억달러로 우리는 중국이 빼앗아 간 인프라를 복구하는 데 쓰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칩스법 관련 기금은 별도로 조성되어 있지만, 러트닉 장관은 광범위한 의미로 이러한 비용을 결국 동맹국에 분담시키겠다고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러트닉 장관은 지분만큼 경영권을 행사하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아니다”면서 “그것은 우리의 초점이 아니다”고 짜증스러운 듯이 답변했다. 그러나 반도체 분야의 패권 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미국 정부가 주요 반도체 회사의 지분을 갖는 것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이익 공유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미국이 한국이나 대만 대신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는 것이다. 지분 확보 구상이 실제로 관철될 경우, 미국은 한국·대만·미국 주요 반도체 회사의 경영상황을 한눈에 들여다 보고 결정적인 순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인텔이나 마이크론 등 자국 기업을 위해 민감한 경영정보를 공유하도록 압박할 가능성도 높다. 러트닉 장관은 그동안 미국이 ‘(약자가 강자에게 심리적으로 동조하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 있었다면서 “미국은 스스로를 다시 세우고, 반도체·파이프라인·원자력발전소 등 국가 안보와 경제 안보를 위해 꼭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국과 닮아가고 있다”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정부가 기업 지분을 갖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대형 인프라 프로젝트처럼 정부의 허가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 혹은 구제금융이나 스타트업 투자처럼 다른 민간 투자자를 찾기 어려울 때 정부가 주주로 나서는 경우가 있다. 수익배분 조항도 종종 등장한다. 칩스법도 1억5000만달러 이상의 자금 지원을 받는 기업이 신청 당시 제시한 예상이익을 초과하는 수익을 낼 경우 미국 정부와 공유하도록 하는 조항을 두고 있다. 실제 이익배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정확한 재무 예측을 유도하려는 설계다.
하지만 현재 트럼프 정부가 추진하는 것은 성격이 다르다. 이미 투자를 진행 중인 기업에 주기로 약속한 금액을 주지 않을 것처럼 위협하면서 지분을 내놓으라는 강압에 가깝다. 미국 상무부는 총 527억달러의 칩스법 기금을 관리하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트럼프 정부 출범 직전 인텔(78억6500억달러) TSMC(66억달러) 삼성전자(47억4500만달러) 등에 대한 칩스법 보조금 지급을 확정했다. 투자 진행단계에 따라 돈을 지급하는 구조여서 실제로는 자금 중 상당부분이 집행되지 않은 상태다.
트럼프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관세 부과를 시작한 데 이어 인텔 최고경영자(CEO) 교체 요구, 엔비디아의 중국 매출에 대한 15% ‘통행세’ 요구, US스틸에 대한 황금주 확보, 희토류 광산에 대한 정부 지분 확보 등 적극적 기업 경영 개입을 망설이지 않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중이다. 일단 정부가 기업 지분을 갖게 되면 잘못된 투자를 했더라도 지속적으로 자금을 투입하려는 유인을 갖게 되고, 기업 경영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린폴리시(FP)는 트럼프 2기 정부가 “국가 자본주의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 경제가 미국화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미국 자본주의가 중국식 국가자본주의를 닮아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