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의 시학은 고독의 시학, 행복과 영적인 쉼에 대한 탐구다.”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 미술관에도 둘레가 유독 관람객으로 붐비는 작품들이 있다. 파리 루브르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나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의 <야간순찰>, 마드리드 프라도의 <시녀들>처럼. 미하일 네스테로프는 바로 들라크루아, 렘브란트, 벨라스케스처럼 이 미술관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작가인데 (그 사회가 가치로 두는 것을 역사적 기록으로 정확히, 동시에 미학적 혁신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그림 가운데서도 가장 눈에 띄는 그림이 바로 폭이 4.8미터에 달하는 <루스에서. 인민의 영혼>이라는 그림이다.
러시아 대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이 그림에는 등장인물이 많다. 근경부터 원경까지 화폭 우측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성화, 즉 이콘을 들고 모여있는 군중이다. 중앙에는 모노마흐의 모자를 쓴 왕이 있고 옆에는 대주교가 보인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짐작되는 군복 차림의 젊은이를 자비의 수녀가 부축하고 있는가 하면, 벌거벗은 유로지비(바보성자)도 있다. 심지어 톨스토이와 솔로비요프와 도스토옙스키도 있다. 이 거대한 군중이 향하고 있는 방향, 그 소실점에 정확히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가 바라보는 쪽으로 군중이 향한다. 아이의 왼손엔 붉은 통이 들렸고 오른손은 가슴에 얹혔다. 이 소년은 예수의 어린 모습일 수도 있고, 이 소년이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예수를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혁명 후 해석하려고 했던 대로 무언가 ‘러시아의 영혼’이라 할 만한 것의 화신일 수도 있다.
어떤 신앙의 권위라는 측면에서 볼 때 놀라운 것은 네스테로프가 출교당한 레프 톨스토이를 그림에 분명하게 포함했다는 점이다. 그가 의도한 바는, ‘사람들은 다 다르게 각자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였다. 그리고 저 농민 복장을 한 아이는 복음서의 비유적 표현을 일깨운다.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 하리라.”(마태복음서 12장 12절)
통합의 구심점으로서의 성인(聖人)
1862년 우파(Уфа)에서 태어난 미하일 네스테로프는 그리스도교 영적 전통에 따라 자랐다. 그의 그림들은 러시아 정교에 대한 묵상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러시아 역사를 추동하는 원동력으로서 그 역할을 조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제조업과 잡화 무역에 종사했지만, 역사와 문학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아들의 예술적 재능에 대해 세심한 관심과 격려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12세가 되던 때 모스크바로 이사한 그는 1877년 모스크바 회화, 조각 및 건축 학교에 입학하여 페로프, 사브라소프, 마콥스키 등의 지도를 받았다. 이에 초기(1879-1884) 작품들은 러시아 이동파 전통에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그는 종교화를 주로 그리는 ‘상징주의적’ 화가였고, 스틸 모데른 -(서양에서 말하는) 아르누보 양식을 취하는- 작가였으며, 아브람체보파를 지원하는 사바 마몬토프를 후원자로 둔 예술가였다. 그렇게 키예프(키이우)의 성 블라디미르(볼로디미르) 대성당과 솔로베츠키 수도원에 수많은 벽화를 작업했다.
세속적인 허영심을 버리고 고독과 가을의 침묵 속에서 행복을 찾은 늙은 수도사를 묘사한 <은둔자>(1888-89)로 자신이 지닌 독창성을 증명한 이래, 네스테로프가 예술적, 도덕적 이상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한 첫 번째 작품은 <어린 바르톨로메오의 환상>(1889-1890)이다. 현자 에피파니우스의 <성 세르기우스의 생애>에서 영감을 받았다. 어린 바르톨로메오는 후에 라도네즈의 성 세르기우스가 된다. 라도네즈의 성 세르기우스는 14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승으로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러시아 인민을 통합시키는 성인의 역할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이 작품은 이동파 전시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거상으로서 예술후원자였던 파벨 트레차코프(오늘날 러시아 미술에 관한 최대 컬렉션을 자랑하는 트레차코프 미술관의 창립자)가 바로 사들였다. 이후 네스테로프는 이 성인의 일생을 다룬 15점의 연작을 그렸다, 무려 50년간!
이 작품이 ‘이동파’ 전시에 합류했다는 점이 바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리얼리즘 회화를 지향하는 비평가 스타소프, 작가 그리고로비치 같은 이들은 이 그림이 이동파가 그토록 열심히 강화해 온 합리주의적 토대를 훼손하고 모호한 신비주의를 전파한다고 우려했다. 적극적 현실의 반영이라 보기 어려운데다 성인의 머리에 그려 넣은 후광은 또 무어냐는 식이었다. 그들은 트레차코프의 바르톨로메오 구매를 말렸다. 그러나 네스테로프를 비판한 베누아 조차 이렇게 말하곤 했다. “초자연적 현상이 주는 매혹적인 공포가 이렇듯 단순한 수단으로 설득력 있게 전달된 적은 거의 없다. … 이 그림에서 가장 멋진 것은 매우 단조로운 회색빛의, 심지어 칙칙하기까지 하면서도 엄숙한 축제 분위기의 풍경이다. 마치 경이로운 유월절(踰越節)의 노래가 이 계곡 위로 흐르는 것 같다.” 네스테로프의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전통적 주제로 가득 찬 세계를 모더니즘 기법으로 형상화하되 그 틈입에 양감을 불어넣는데 탁월했기 때문이다.
신자와 자연의 축복받은 친교
투르게네프가 아샤, 리자를 통해 자신만의 여성상을 창조한 것처럼, 흔히들 “네스테로프의 소녀”라 할 때는 민중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여성의 모습-내면의 아름다움, 고통으로 가득 찬 민감하고 외로운 영혼을 가진 여성의 이미지가 연결된다. 이런 여성상은 그의 작품 안에서 충분히 대중적이면서도 새롭게 시적이었다. 그렇게 <언덕에서>(1896), <볼가강에서>(1905) 등이 이어졌다. 헛되이 보일지라도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조차 기꺼이 사랑을 주는, 예민하고 깊은 여성의 영혼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와 함께 네스테로프가 그려낸 풍경적 요소는 가느다란 흰 줄기의 자작나무, 얽히고설킨 버드나무, 얼어붙은 숲이 비치는 고요한 바다였다. 정신적인 자연이 인물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며 그들의 운명에 공감하는 듯하다.
‘수도원’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 네스테로프는 위엄있는 주교나 장엄한 의식이 있는 예배, 금으로 칠한 교회 내부를 묘사하지 않았다. 네스테로프의 종교화의 특징에 주목하면서, 문헌학자이자 예술사가였던 두릴린은 다음과 같이 썼다. “네스테로프는 항상 소박한 수도사들을 독방에서, 교회에서, 수도원 담장에서 데리고 나와 숲속의 광야로 데려가 기도와 함께 홀로 남겨두고, 생명을 주는 자연과 얼굴을 맞대게 한다. (그가 주목한 광경은) 신자와 자연의 축복받은 친교였다.” <침묵>(1903)과 같은 작품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탐구는 삶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성인과 순례자들(러시아 인민)에 둘러싸인 그리스도를 묘사한 <신성 러시아>(1901-1906)를 거쳐 드디어 앞서 소개한 <루스에서. 인민의 영혼>(1914-16)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는 러시아와 러시아인의 운명에 관한 생각을 구현해야 했고, 이에 러시아 역사와 민족정신의 한 측면을 구현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을 통합해 강둑을 따라 행진하게 했다. 네스테로프의 동시대인을 포함해 고대부터 당시까지 모든 사회 계층의 대표자들을 하나의 열망으로 모았다. 화가로서 그의 삶은 <어린 바르톨로메오의 환상>으로 시작해 <루스에서. 인민의 영혼>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초상화가로서 생존
1917년 혁명은 당시 55세였던 작가에게 일종의 이정표가 되었다. 내전 발발 후, 네스테로프 가족은 코카서스로 떠날 수밖에 없었고 1920년이 되어서야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혁명 이후에 그는 초상화가로 살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얼굴이었다. 눈에 불꽃이 담기고, 입술의 따뜻한 미소가 고여 이들이 전류를 형성하고 그림 속에서 인물 전체와 호응해 전체적인 아우라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그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네스테로프는 대중의 따뜻한 환영을 얻었지만, 비평가들은 그에 적대적이었다. '프라우다'지는 소련에 여전히 반동의 중심이 있다면 네스테로프의 캔버스에 포착될 것이라는 기사를 낼 정도였다. 초상화가로서 네스테로프는 그 시대 뛰어난 사람들에 매료되었다(주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매료된 사람들을 그렸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게, <막심 고리키>(1907)와 <레프 톨스토이>(1907), <철학자들>(파벨 플로렌스키와 세르게이 불가코프)(1917), <수술대 앞의 외과 의사 세르게이 유딘>(1933), <생리학자 이반 파블로프의 초상>(1930, 1935) 등이 탄생했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1938년 대숙청의 와중에 ‘반동 종교화가’였던 미하일 네스테로프는 체포되어 교도소에서 2주를 보냈다. 변호사였던 그의 사위는 간첩 혐의로 기소된 후 총살당했고 딸 올가는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다가 심한 고문 끝에 1941년 장애를 입고 돌아왔다. 그러나 자신이 그린 파블로프의 초상화 덕분에 네스테로프는 스탈린 훈장을 받으며 오히려 인민의 영웅으로 부활했다. 1942년 10월 18일 그는 모스크바의 보트킨 병원에서 8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 그는 팔레트와 붓을 손에 들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였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