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무대 디자이너 "난 디테일에 집착하는 광기의 완벽주의자"

입력 2025-08-14 14:17
수정 2025-08-26 08:25
"무대 세트의 디테일 하나하나에 집착(obsessive)했어요. 마치 개츠비가 데이지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최근 서울 역삼동 GS아트센터에서 만난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의 폴 테이트 드푸(36) 무대·영상 디자이너는 자신을 "미친 디자이너(crazy designer)"라고 소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정말 그랬다. 자로 재어 그린 듯 반듯한 눈썹과 한 가닥도 빠짐 없이 쓸어넘긴 머리칼. 그는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광기의 완벽주의자'였다. 지난 1일 개막한 한국 창작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에 벌써 뜨거운 찬사가 쏟아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무대화된 '위대한 개츠비'는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가난한 군인 출신의 제이 개츠비가 부유한 집안의 옛 연인 데이지 뷰캐넌과의 재회를 꿈꾸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가 아시아인 최초로 리드 프로듀서를 맡아 작년 4월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했고, 1년 만인 올해 4월 런던 웨스트엔드에 진출했다. 드푸의 무대 디자인은 한국 공연에도 그대로 적용됐지만 완성도는 한층 높아졌다. 그는 "발광다이오드(LED) 영상의 해상도만 봐도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의 두 배"라며 "한국 버전은 '플래그십 공연'으로 내세울 수 있을 만큼 기술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가장 뛰어나다"고 강조했다.



오디컴퍼니는 한국 공연에만 180억원을 쏟아부었다. 브로드웨이 출신 배우 투입, 무대 제작 등에 따른 비용으로 다른 국내 대형 창작 뮤지컬에 비해 최소 두 배 많다. 뉴욕에서 주로 활동해온 드푸에게도 이번 작품은 손에 꼽히는 대작. 앞서 그는 오디컴퍼니가 선보인 뮤지컬 '타이타닉'과 '스위니토드'에 무대 디자이너로 참여했고, 당시 인연으로 이번 작품에 합류했다. 그는 "고등학생 때 처음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무대 디자인을 직접 그려볼 만큼 푹 빠졌다"며 "이 작품을 디자인하는 꿈을 이루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브로드웨이 입성 전 3개월 만에 그는 무대 디자인을 전부 갈아엎었다. 완벽에 가까워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작이 유명한 만큼 부담감도 컸다. "책을 읽었든 읽지 않았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개츠비에 대한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즐길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야 했죠. 개츠비가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어떤 것을 창조했는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열쇠는 책 안에 있었다. 그는 원작 소설을 20번 가까이 반복해 읽고 오디오북도 계속해서 들었다. 그렇게 이해한 소설을 바탕으로 무대와 영상 디자인 1400여장을 인화한 뒤 작품에 가장 어울리는 이미지를 선별했다. "개츠비는 가질 수 없는 대상을 열망하며 일종의 환상(illusion)에 빠져 있어요. 마치 유리가 빛을 반사하고 왜곡시키는 것처럼 현실과 다른 모습에 사로잡혀 있죠. 이런 메시지를 나타내기 위해 유리에서 얻은 영감을 장면들에 녹여냈습니다." 그 결과, '위대한 개츠비'의 무대 디자인은 지난해 68회 드라마 데스크 어워즈에서 최우수 무대 디자인상을 받았다.

금빛으로 치장된 개츠비의 초호화 저택도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디자인 제의를 받자마자 떠오른 게 '알렉산더 맥퀸이 개츠비의 집을 건축한다면 어떤 느낌일까?'라는 생각이었어요. 실제로 개츠비 저택의 모든 디테일은 (위대한 개츠비의 시대적 배경인) 1920년대에서 맥퀸이 영감을 받아 만든 금 목걸이를 참고했어요."

지금까지 한국 관객들의 관람 후기를 보면 화려한 무대에 대한 호평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뜻밖에도, 드푸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장면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개츠비의 장례식장에서 데이지의 집으로 전환되는 장면이에요. 꺼져 있던 불이 확 켜지며 '이게 바로 현실'임을 일깨워주죠. 기술적으로 어렵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오히려 단순함 속에서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장면이에요."



한국 관객들은 초록빛 가득한 오두막집 앞에서 개츠비와 데이지가 재회하는 장면을 가장 인상적이라고 꼽는다고 한다. 무대 세트는 창문과 현관문뿐이지만, 오두막집을 뒤덮은 잎사귀의 미묘한 떨림까지 구현한 LED 영상이 사실감을 극대화한다. 드푸는 "오두막집 장면이 어떻게 만들어질지 모두가 의구심을 품었는데, 조명 디자이너와 협력해 그림자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해 자연스러운 장면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했다.

드푸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마술사로 활동했다. 그러다 허리케인 피해로 극장이 물에 잠기자 디자이너의 길로 들어섰다. "뭔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지, 같은 쇼를 반복하는 건 원치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결과적으로 허리케인이 제게 축복이 된 것이죠."

그에겐 뮤지컬도 마법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 극중 '머틀 윌슨'이 무대 위에서 순식간에 의상을 갈아입고, 침대도 알아차릴 틈 없이 무대 한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장면 전환이 61차례나 이어져요. 무대 위 모든 게 퍼즐 조각처럼 맞춰져야 하죠. 그런 움직임이 모두 마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객석에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작은 비밀도 털어놨다. "개츠비가 던지는 셔츠에는 증조할머니가 직접 만든 라벨이 하나씩 붙어 있습니다. 증조할머니가 증조할아버지의 양복을 손수 제작하시면서 라벨도 만드셨거든요. 아무도 보지 못하는 이 디테일이 제게는 가장 큰 의미입니다."

한국 관객들에게 남다른 애정도 표했다. "작품을 대하는 한국 관객의 열정에 많은 자극을 받았어요. 너무 감사해요. 이번 공연도 즐겁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사랑의 어두움, 빛의 왜곡처럼 '위대한 개츠비'에는 제가 사랑하는 모든 주제가 담겼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는 오는 11월 9일까지 GS아트센터에서 만날 수 있다.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