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이름은 제시라고 지었다. 영어 이름이다.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태어난 아기. 그 아이가 자랐을 때는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 당당하게 제 몫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시의 일기> (p.34)
어둠 속에서도 인간은 빛을 본다.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일제강점기에도 부모는 갓 태어난 아이의 이름에 희망을 담았다. ‘능력 있는 한국인’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은 언젠가 다시 일어설 조국의 미래와 겹쳐 놓은 약속이다. 역사책에 이름을 새긴 독립투사가 아닐지라도, 그 시절 대다수 보통 사람의 마음 역시 언젠가 찾아올 광복의 그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광복 80주년 항일 유물 한자리에<제시의 일기>는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한 양우조, 최선화 부부가 딸 양제시를 낳고 쓴 육아 일기다. 사실 이 육아 일기는 엄혹하던 그 시절 항일투쟁의 실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1938년 7월 4일부터 1946년 5월 4일까지 약 8년간 우리 임시정부가 일제의 공습을 피해 중국 광저우, 류저우 등을 거쳐 충칭에 자리 잡은 이동기, 이 고난의 행군을 버텨야 했던 임정 요인과 가족들의 현실적인 삶, 해방을 맞이해 고국에 돌아온 감격 등을 담고 있어서다.
그 시절 항일운동가들이 살아낸 시대를 품은 <제시의 일기>가 시대를 건너 고국에 돌아왔다. 세계 속에서 제 몫을 다하는 대한민국에서 능력 있는 한국인으로 자란 수많은 제시와 만났다. 12일 서울 덕수궁 돈덕전에서 열린 ‘빛을 담은 항일유산’ 특별전에 전시되면서다. 국가유산청이 광복 80주년을 맞아 근대기 항일 독립유산을 조명한 전시로, 개항기부터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광복에 이르는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를 담은 유물 11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이번 특별전은 ‘두 발로 세계를 제패하다’(국립중앙박물관) ‘태극기 함께 해온 나날들’(국립역사박물관) 등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중에서도 돋보인다. 전국 각지, 기관에 흩어진 항일 유산들을 한자리에 모은 흔치 않은 전시라는 점에서다. 전시 기획을 총괄한 황선익 국민대 교수는 “항일 독립운동 유산이 지닌 의미를 말하는 전시”라며 “실물로 볼 기회가 좀처럼 없는 유물이 많다”고 설명했다. ◇안중근 유묵 ‘녹죽’도 첫 공개실제로 일반 대중이 쉽게 눈에 담기 어려운 귀중한 유물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장기를 먹으로 덧칠해 만든 ‘서울 진관사 태극기’가 대표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6월 취임 기념 오찬에서 옷깃에 배지로 달아 화제가 된 보물로, 이번이 세 번째 공개다.
4월 미술품 경매사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돼 고(故)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의 딸인 구혜정 여사가 9억4000만원에 낙찰받은 안중근 의사의 유묵 ‘녹죽’(綠竹·푸른 대나무)도 이번 전시에서 처음 소개된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으로 떠나기 직전 백범 김구와 맞바꾼 회중시계도 나왔다.
김구, 안중근 같은 유명 독립투사가 남겼거나 보물 등 국가가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유물만이 전시의 전부는 아니다. 후손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독립을 향한 염원과 당시의 치열한 흔적이 느껴지는 유물과 만나보는 게 전시의 묘미다. 역사 속 이름 없는 이들의 항일정신이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정체성을 만든 뿌리가 됐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이 유럽에서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서영해의 자필 유고집과 1929년 프랑스 파리에 언론사를 설립한 사실을 증명하는 ‘고려통신사 상세기재등록 신고서’다. 한국 최초의 한글 사전 ‘말모이 원고’, 한글학회의 ‘조선말 큰 사전 원고’ 등 민중 교육에 힘을 보탰던 유물들도 눈길을 끈다.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오늘날 세계를 리딩하는 K컬처의 바탕은 우리 민족의 강인함”이라며 “그 역사와 정신을 보여주는 항일 유산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미래세대에 넘겨줘야 할 우리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10월 12일까지.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