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티스·베이컨에서 영감 받은 '검은 서사'…마음 속 심해로 '다이빙'

입력 2025-08-12 18:49
수정 2025-08-12 20:37
자기복제는 창작자들의 경계 대상 1호다. 일정한 화풍과 예측 가능한 형태는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발전 없는 예술이라는 굴레에 갇히기 쉽기 때문이다.
스페이스K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딥다이버(Deep Diver)’는 한 작가가 경험한 이러한 맥락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자리다. 지금껏 서사 중심의 회화를 선보여온 배윤환 작가(42)의 대규모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는 매체를 넘다드는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드로잉부터 회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설치 작품까지 총 130여점이 소개된다. 배 작가는 그간 주로 개인적인 고뇌와 시대의 불안을 우화적 서사로 풀어내왔다. 검정색을 활용해 등장인물과 이야기들로 화면을 빼곡하게 채우는 식이다. 평면 회화, 비디오, 설치, 그래피티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자신의 미적 세계관을 촘촘히 구축해온 배윤환은 밀레니엄 이후 한국 구상미술의 행보와 그 고유한 양상을 구축하고 적극적으로 발전시킨 선두 그룹 중 한 명. 이번 전시에는 기존 형식의 작품과 함께 새로운 모습의 신작을 함께 선보인다. ‘복잡하고 명확한 형상’에서 ‘단순하고 비정형적인 형상’으로 변화하는 작가의 여정에 주목하는 자리다.

전시장 초입의 ‘서커스’ 연작은 감정의 전달 방식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반영됐다. 화면 주변부를 비워내고 정리해 기존에 그가 보여준 작품과는 다른 형태를 시도했다. 사물의 묘사나 서사를 생략한 채 선과 색채, 조형 요소로만 관람객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이 시리즈는 인간 내면을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한 영국계 아일랜드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어 심리적이고 추상적인 방법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배 작가에게 이번 전시는 터닝포인트를 향한 여정과도 같다. 오래전부터 절감해 온 변화를 매만지며 이상적인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자리인 것. 전시장에서 만난 배윤환 작가는 전시명에도 이러한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어두운 심해를 유영하는 다이버처럼 제 자신이 딥다이버가 돼 제 작품 세계 속 흩어져 있던 작업의 파편이나 기억들을 다시 관찰하고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전시명을 딥다이버로 지었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원한다고 단번에 해답을 주지 않았다. 기존과는 다른 문법으로 작업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아직은 속도와 방향성을 맞춰 가는 중이다. “이미 제 머릿 속에는 기존에 제 작업과는 다르게 형상을 무너트리고, 앞으로 화면을 어떻게 구성하고 싶은지에 대한 결말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전 좌석 안전벨트’나 ‘요람’과 같은 서사적 작품을 그리지 않고서는 그 지점으로 넘어가지 못하겠더라고요. 제 작업을 ‘기-승-전-결’로 표현한다면 이 작품들은 마치 ‘승’과 ‘전’의 중간 단계에 있는 것 같아요. 이 과정이 있어야 ‘결’에도 도달할 수 있겠더라고요”



새로운 전환점을 향한 작가의 선언적 면모가 두드러지는 작품은 전시장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요람’이다. 성난 파도, 거대한 고래와 부딪힌 선박은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중앙에는 고릴라가 잠자는 아기를 안고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듯한 제스춰를 취하며 대비되는 모습이다. 작품 속 이야기는 화면 밖까지 이어진다. 검정색을 덧입힌 전시장 벽면에 분필로 그린 드로잉과 조각난 파편들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파편들은 졸업이라고 적힌 학사모를 쓰고 있거나, '모든 것이 변하고 있어'라고 적힌 일기장이 펼쳐져 있다. 마치 작가의 작업 여정이 새로운 챕터로 나아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의 작품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노동하는 이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무언가를 묻히고 있다. 작품 ‘오아시스-365’에 등장하는 어부들과 막장에서 일하는 ‘우린 잘 지내고 있어’의 광부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호장비를 착용한 '숨쉬는 섬'의 양봉업자, 그리고 선크림을 바르고 있는 사람들까지. 오징어 먹물부터 먼지, 선크림 등이 묻은 모습이다. 여기에는 ‘그림 노동’을 한다고 표현한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모습이 녹아 있다. “스스로 왜 이렇게 특정한 상황 속에 놓인 사람들을 그리게 되었는지 고민해봤는데, 아마도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목탄이나 오일 파스텔 등을 사용할 때 재료의 검은색이 몸에 많이 묻어서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외에도 앙리 마티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마티스는 단서를 남겼다’ 연작과 경고음을 배경음으로 소비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사이렌’ 연작, 얼굴에 금이 박힌 광부들의 초상을 통해 인간 욕망을 곱씹어보는 ‘두 번 내려쳐’ 연작 등을 소개한다. 매 전시마다 공간 활용을 극대화해 스펙터클을 선보여온 스페이스K는 이번에도 배윤환의 작품 130여 점을 알차게 배치했다. 전시는 11월 9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