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마스가(MASGA)와 잭 덩컨의 유산

입력 2025-08-08 17:47
수정 2025-08-09 00:12
‘South Korea hunts for Scotsman’(한국이 어떤 스코틀랜드인을 추적하고 있다).

2011년 스코틀랜드 언론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하나 실렸다. 쫓는 이는 한국 정부, 대상은 일명 ‘잭 덩컨’. 기사가 나오기 전에 주영국 대사관은 구인 광고를 냈고, 그 광고를 본 지역 언론에서 한국 정부가 잭 덩컨을 찾는 이유를 취재해 1면 머리기사로 쓴 것이다.

무슨 사연일까. 사실 잭 덩컨은 조선(造船) 기술자다. 현대중공업이 독(dock·선박 건조장)도 없이 맨땅에서 배를 만들던 1975년 선주였던 아랍해운 소속으로 한국에 건너와 수년간 기술을 전수해 준 인물이다.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은 덩컨과 종종 막걸리를 마시며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35년 뒤 한국 조선업은 세계 최고가 됐고, 이후 대통령이 되자 그를 기억해 주영 대사관에 그를 찾으라는 특명을 내린 것이다.


기사가 나간 지 1주일 만에 덩컨의 아들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한다. “당신들이 찾는 게 내 아버지, 윌리엄 존 덩컨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께 한국 이야기를 자주 하셨죠.” 그해 말 앤드루 덩컨은 고인이 된 아버지 대신 한국에 초청돼 최고 영예의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 일화는 당시 주영 대사관에서 일하던 한 관료로부터 몇 년 전 지나가듯 들은 얘기다. 이번 한·미 관세 협상에서 ‘마스가(MASGA) 프로젝트’가 타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소식에 불쑥 기억이 되살아났다. 지금 이 일화는 그때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공개적으로 “조선이 없었다면 협상은 평행선을 달렸을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많은 Z세대가 아마 들어보지도 못했을 ‘사업보국’이 2025년에 다시 실현된 셈이어서다. 만일 이달 1일 협상 시한을 넘겨 일본과 달리 25%의 자동차 관세를 맞았다면? 아찔한 일이다. 결국 위기 앞에서 50년 전 정주영 회장과 ‘수많은 잭 덩컨’들의 헌신(또는 기업가정신)에 빚질 수밖에 없는 게 산업국가 한국의 숙명이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기업들이 할 일은 이제 시작이다. 조선소를 짓고 인력을 투입하는 것은 물론 어쩌면 핵심 기술까지 이전해야 할 수도 있다. 단기간에 끝날 일도 아니다. 5년, 10년, 수십 년이 걸리는 일이다. 돈을 누가 댈지도 말이 다르다. ‘그동안 너희가 떼어먹은 것을 받을 뿐’이라는 식의 미국을 상대로 사업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물론 사업 과정에서 우리도 기회를 모색하겠지만, 풍전등화 위기에서 일단 강풍을 누그러뜨린 기업들의 공은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다.

잭 덩컨을 왜 찾느냐는 스코틀랜드 신문 취재에 당시 주영 대사관은 이런 멘트를 꼭 넣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한국은 절대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 특정 개인이나 기업인을 무작정 추앙하자는 게 아니다. 한국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야만 하는 길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기억하자는 것이다. 개선해야 할 점을 고쳐나가는 데 그 방법이 꼭 파괴적이고 자해적일 필요는 없다. 얄궂게도 세계 최강이던 영국의 조선업은 덩컨이 우리에게 기술을 전수하던 시기 저물었다. 비효율적인 노동시스템이 큰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관세 협상 시한을 앞두고 미국으로 달려간 기업인들이 국내로 돌아와 맞닥뜨린 상황은 이중고(二重苦)라는 표현을 실감케 한다. 노란봉투법은 지금보다 더 심한 만성적 파업을 불러올 태세고, 징벌적 상속세제는 ‘부자 감세’ 프레임에 개선될 줄 모른다. 모두 한국판 ‘러스트 벨트’를 오히려 가속화하는 자해적 정책이다. 다른 국가들과 함께 15% 관세를 맞는다는 것은, 15% 관세 부담을 누가 더 효율적으로 줄이느냐의 레이스가 추가된다는 의미다. 미국 의도대로 관세 감축을 위한 각 기업의 현지 생산 확대 경쟁이 가속화할 가능성이 있다. 조선업은 하청 파업에 시달리다가 미국 생태계를 살리기도 전에 국내 생태계 악화에 직면할 수도 있다.

제조업 패권을 내준 미국은 다시 한국과 일본으로부터 이를 되찾으려 하고 있다. “우리의 반도체산업을 대만이 빼앗아 갔다”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꼭 대만을 향한 것만은 아니다. 미국의 관세는 트럼프 이후에도 계속될 전망이고, 한국 기업들은 계속 자원의 미국 이전과 현지 생산을 요구받을 가능성이 크다. 기업의 사업보국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한국은 선대의 ‘위대한 유산’인 우리 기업을 지킬 준비가 돼 있는지 정치권에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