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화학공정신기술연구소 정문을 지나면 ‘유공 연구실’이란 간판이 눈에 띈다. 유공은 1962년 설립된 국내 최초의 정유회사인 ‘대한석유공사’를 줄여서 부르던 말이다. 1980년 선경그룹(현 SK그룹)에 인수돼 민간 정유사로 변신한 유공은 1984년 서울대 화학공학과(현 화학생물공학부)와 정유·석유화학 공정 신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실을 설립했다.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한국을 글로벌 석유화학 강국으로 만든 공정 기술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1996년 설립된 서울대 화학공정신기술연구소는 유공 연구실을 모태로 했다. 정유·석유화학산업을 넘어 반도체, 나노, 바이오 등 화학 공정이 쓰이는 거의 모든 산업 분야로 연구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다. 설립 후 29년간 발표한 국제 논문만 1만2687건에 달한다. 개발한 지식재산은 4926건, 산업체에 이전한 기술은 78건이다. 연구소가 배출한 학·석·박사 인재는 5500명에 이른다.
화학공정신기술연구소에서는 산업계를 바꾼 핵심 기술이 다수 탄생했다. 가장 대표적 성과 중 하나가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가 개발한 ‘승온법’이다. 승온법은 저렴하고 안전한 금속염 전구체를 서서히 가열(승온)해 균일한 나노 입자를 대량으로 합성하는 기술로, 기존 ‘고온 주입법’을 대체하며 나노입자 제조의 표준 공정으로 자리 잡았다.
승온법은 고화질 디스플레이 구현을 위한 아주 작은 크기의 양자점(quantum dot) 재료 생산을 비롯해 자기공명영상(MRI) 조영제, 치료용 나노입자, 줄기세포를 이용한 첨단 신약, 고성능 태양전지 등 다양한 나노 소재 개발에 활용되고 있다. 이 기술은 한화케미칼로 기술 이전돼 수십억원 규모의 계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서상우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연구팀은 미생물을 활용한 합성생물학 기술로 바이오 제조 분야 혁신을 이끌고 있다. 미생물이 온전한 단백질만을 선택적으로 생산해 제품의 품질과 수율을 높이는 합성단백질품질관리(synthetic protein quality control) 시스템과 미생물 대사경로의 유전자 발현을 번역 단계에서 정밀하게 조절해 유용 물질 생산을 극대화하는 기술이 대표적이다. 이는 미생물 속 유전자 스위치를 정밀하게 껐다 켜 원하는 재료를 더 많이, 쉽게 만드는 기술로 의약·화장품 산업 등의 공정 혁신에 활용되고 있다.
연구소가 배출한 인재들은 산업계와 학계에서 활약 중이다. 2차전지 및 연료전지 시험 검사 진단 분야 강자인 민테크를 창업한 홍영진 대표를 비롯해 나상섭 한화토탈에너지스 대표, 김형국 전 GS칼텍스 대표 등 석유화학산업 리더를 배출했다. 2013년 뇌 조직을 투명화하는 혁신적 기술로 세계 화학공학계를 놀라게 한 정광훈 MIT 화학공학과 석좌교수도 화학공정신기술연구소 출신이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