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폭우가 번갈아 이어지는 가운데 에어컨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연식이 오래된 아파트를 중심으로 예고 정전·정전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일부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주민들에게 “오늘 밤 정전이 벌어질 수 있으니 에어컨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때아닌 경고 메세지를 전파하기도 했다. 아파트 단지 별로 일시적인 ‘셧다운’이 발생하면서 인근 신호등, 학교까지 ‘정전 유탄’을 맞는 소동도 빚어졌다.
지난달 27일 서울 노원구의 99년식 아파트에서 약 2시간 동안 갑작스러운 정전이 발생했다. 28일에는 부산 수영구의 86년식 아파트에서 990세대가 정전 피해를 입었다. 같은 날 경기 고양의 1993년식 아파트에서도 604세대가 예고 없는 정전 사태를 겪었다. 29일에는 인천 영종도의 2003년식 아파트와 경기 성남의 92년식 아파트에서 각각 정전이 발생했다. 이들 아파트는 공통적으로 준공한지 최대 40년까지 된 ‘노후 아파트’다.
서울 노원구에 거주하는 직장인 이재현씨(27)는 지난 27일 "주말 저녁에 친구와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정전이 일어나 컴퓨터 전원이 꺼졌다"며 "2시간 정도 정전이 지속돼 불편을 겪었다"고 말했다.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거주하는 직장인 김수민씨(27)는 "아파트에 변압기 용량증설 공사로 인한 정전 공지가 붙어 정전 예고일에는 일부러 퇴근을 늦게 했다"며 "집에 있는 가족들과 미리 냉장고를 다 비우고 근처 쇼핑몰에서 시간을 때웠다"고 말했다.
6일 한국전력에 따르면 서울시 연간 주택용 전기 판매량은 매년 증가해 2020년 1만 4302GW에서 지난해 1만5720GW로 약 9.9%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정전 건수는 2020년 651회에서 2024년 893회로 37% 증가해 더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또한 전력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평균 최대전력은 85GW로 지난해 7월보다 5.6% 늘어 1993년 집계 이후 최대치를 경신했다. 최대전력은 하루 중 전력 수요가 가장 많은 시간대의 수요를 뜻한다. 이는 가정용 에어컨 약 8500만 대가 동시에 작동하는 수준이다. 정부는 지난달 10일 여름철 전력 수급 전망 및 대책을 발표하면서 10GW 안팎 수준에서 예비력을 유지하고, 이달 19일까지를 대책 기간으로 정했다. 한국전력 등 관계기관은 전력 수급 종합 상황실을 운영하며 비상대응 체계를 가동하고 있다.
문제는 폭증하는 전력 수요를 아파트의 전기 설비가 감당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난 6월 부동산 정보업체 부동산 R114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전국의 아파트·연립 등 공동주택 1204만9028 가구 중 ‘30년 초과’ 주택이 260만6823 가구로 전체의 21.6%를 차지한다. 30년 초과 노후 주택 비율은 지난 2022년 12%에서(136만 가구)에서 2023년 15%(171만 가구), 2024년 18%(219만 가구)로 집계돼 매년 증가하고 있다. 특히 분당의 경우 올해 30년 초과 아파트가 88%에 달해 정부의 노후도시계획특별법에 선정된 바 있다.
한국전력공사 관계자는 “아파트 변압기 용량 초과와 자체 설비 노후화가 정전의 주된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변압기는 변전소에서 받은 고압 전기를 가정에서 사용 가능한 저압 전기로 변환하는 장치다. 현행 법령에서는 주택에 설치하는 전기시설 용량을 세대별 3kW로 정하고 있으나, 현재 세대당 평균 전력 사용량은 4kW인데다 1991년 이전에 지어진 아파트는 1kW대에 불과한 곳이 많다. 실제로 성남 아파트 정전 사태의 경우 변압기 용량을 증설하기 위한 예고 정전에 해당했다. 이마저도 교체·수리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변압기를 그대로 두는 관리사무소가 대부분이다.
부산 수영구의 아파트와 인천 영종도의 아파트 정전은 각각 자체 설비와 개폐기 문제로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변압기를 거친 저압 전기는 배전반을 통해 각 세대나 엘리베이터 등 주요 시설로 전력이 공급된다. 개폐기는 전기를 차단하거나 다른 회선으로 공급을 전환하는 장치다. 노후한 전기 설비가 급증한 전력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실제로 한국전기안전공사가 지난해 정전사고로 출동한 횟수는 284건으로, 이 중 절반을 넘는 153건이 사용 연한이 15년 이상 된 노후 설비 고장 때문이었다.
이영주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노후 아파트의 변압기는 열화나 오염으로 인해 사고 가능성이 높다”며 “여름철을 대비해 변압기 등 전기설비의 상태를 사전에 점검하고, 교체가 필요한 경우 적절한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유진 기자 magiclam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