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0 한·미 관세 합의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 부과 예정이었던 25% 상호관세를 15%로 깎았다는 점에서 통상당국의 큰 성과로 평가된다. 하지만 미국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과 무역안보법 232조 등을 근거로 상호·품목관세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인 한국에게도 일방적으로 관세 부과를 확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한·미 FTA가 유명무실해졌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정부 일각에선 한·미 FTA의 요지가 '상호 무관세'에 있긴 하지만, 각종 부속 합의에도 있다는 이유를 들어 완전히 FTA가 폐기된 건 아니라는 반론도 나온다.
1일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이번 한·미 관세 협상 타결의 가장 큰 의의는 급박한 시한 내 협상을 타결했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고했던 상호관세 발효 이틀 전인 현지시간 7월 30일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비롯한 한국 협상단이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과 협상을 마무리했고, 끝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정부 관계자는 "일본과 유럽연합(EU)이 합의한 것과 동일한 관세율을 확보하며 동등한 조건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설명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했다는 점이 최대 성과다. 한국만 '25% 상호관세'가 확정됐을 경우, 미국 시장에서 일본과 EU산 제품 대비 가격 경쟁력이 급격히 악화됐을 수 밖에 없다. 품목관세를 깎지 못했을 현대·기아차는 3조원에 달하는 관세비용을 추가로 물어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성과 이면에는 그림자가 짙다. 이번 관세 부과로 한미 FTA체제가 사실상 무력화했다는 점이 지목된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전날 브리핑에서 "한미 FTA라는 것이 상당히 많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라며 "각 나라 협상을 보면 WTO(세계무역기구)나 FTA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고, 체계 자체가 많이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미 FTA 무력화의 실질적 의미한미 FTA 협정문 2.3조는 "규정된 경우를 제외하곤 관세 인상이나 새 관세를 채택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상호 무관세가 FTA의 요체인 셈이다. 이를 두고 전날 주원 현대경제연구원장은 방송 출연에서 “현실적으로 FTA가 날아갔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FTA 23.2조의 '국가 안보 예외' 조항을 활용해 FTA를 우회했다. 이 조항은 "자국의 필수적 안보 이익의 보호에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조치는 FTA적용을 배제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미국은 그동안 자국법인 무역안보법 232조와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관세 부과의 정당성을 주장해왔다. IEEPA는 1977년 제정된 오랜 법률로,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경우 외국과의 거래를 제한할 수 있도록 미 대통령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IEEPA를 꺼내들어 만성적인 무역적자 자체가 '국가 위기'라며 전방위적 관세 정책을 추진했다.
문제는 이런 조치가 FTA 체결국인 한국에도 예외 없이 적용됐다는 점이다.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은 일본, EU와 같은 대우를 받게 된 한국 상황은 FTA의 핵심인 '상호 무관세 원칙'이 '일방 유관세'로 바뀌게 된 것을 의미한다. 자동차 관세 2.5%포인트의 비밀협상의 이면에 가장 큰 타격을 받는 분야가 자동차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는 한미 FTA 체결국이라는 점을 들어 자동차 품목관세를 12.5%로 낮춰 기존 일본과 EU보다 2.5%포인트 더 대우받는 것을 협상 목표로 삼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자동차는 모두 15%'라는 원칙으로 좌절된 것으로 보인다.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 등에 따르면 일본과의 관세 협의에서 '자동차 15%'를 두고 미국 자동차 산업 중심지인 디트로이트 등에서 크게 반발한 점을 미 정부가 특히 우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농산물을 레드라인(양보할 수 없는 분야)라고 여겼던 것처럼 자동차 15%도 트럼프 대통령에겐 레드라인이었던 셈이다.
정부 관계자는 "2.5%포인트는 자동차 산업에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는 숫자가 될 것이고, 한국 완성차 업체들은 충분히 역량을 발휘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일본과 EU 자동차 관세인 2.5%포인트 만큼 가격 우위를 누려왔던 한국 자동차가 앞으로는 동일한 관세를 부담하게 됐지만, 현지 생산 확대와 공급망 재편으로 품질과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려 대응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번 합의는 글로벌 통상 질서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시각도 많다. 기존 다자주의 무역질서를 무력화 시키고, 트럼프 대통령이 선호하는 양자 거래 중심의 새로운 관세 협약으로 국제 무역질서가 새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협상에 참여한 통상관료들은 "무역적자를 더이상 지속할 수 없고, 국내 제조업을 되살리겠다는 생각이 트럼프 대통령 뿐 아니라, 미국 주류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공통된 인식임을 여러차례 확인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번 협상에서 한국은 반도체와 의약품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 대비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이 분야의 품목관세 부과가 조만간 예정돼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미 FTA는 유명무실한가그럼에도 전문가들은 FTA는 완전 무력화된 건 아니라고 설명한다. 협정의 각종 부속서 조항이 여전히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한미 FTA의 부속서 조항 중 가장 강력한 보호장치로 여겨지는 건 공공퇴직제도, 연금제도, 국민건강보험 등 법정 사회보장에 대한 적용 배제 조항이다.
보건의료와 교육사회서비스 전반, 전기와 가스 등 공공성이 높은 분야, 방송 등 시청각, 농수산물 유통서비스 등도 래칫(자유화 역진방지) 조항 적용대상이 아니다. 정부가 자율적인 정책으로 보호할 수 있는 분야다.
FTA가 통상 논의를 위한 채널로 여전히 가치를 갖는다는 평가도 나온다. 정철 한국경제연구원 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앞으로 통상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한미 FTA를 갖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미국과 따로 소통할 수 있는 한미 FTA라는 채널을 우리가 (최대한) 활용할 부분"이라고 했다.
이번 한미 관세 합의는 단기적으로는 최악의 상황을 피한 성과가 확실하지만, 앞으로 한국 산업은 보호막이 없는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여한구 본부장은 전날 관세 협상에 대해 "소나기를 피했다"고 표현했다. 일단 급한 불을 껐지만 미국이 언제든 다시 관세, 비관세 장벽 이슈를 제기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앞으로 3~4년 동안 안정된 환경을 유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며 "미국 관세 정책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안주하면 안 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제도변화와 기업의 대비를 촉구했다.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