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만에 꺼낸 '죠스'의 비하인드 스토리

입력 2025-07-25 11:15
수정 2025-07-25 11:41
스티븐 스필버그는 관객의 마음속에 추억을 비출 등불의 영화를 여럿 선사한 이 시대의 영화감독이다. 위험천만한 모험에 진심인 고고학자 인디아나 존스의 <레이더스>(1982), 친근한 외계인의 대명사 <E.T.>(1982), 시각효과를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린 <쥬라기 공원>(1993), 리메이크도 걸작으로 만들어버리는 <우주전쟁>(2005)까지. <미지와의 조우>(1977),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에이 아이>(2001),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 <레디 플레이 원>(2018) 등 언급한 영화 외에도 이 정도의 리스트를 더 만들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스필버그의 영화 중 한 편을 꼽는다면'이란 질문 자체가 팬들을 곤란에 빠뜨릴 수 있는데, 올해로 한정한다면 <죠스>(1975)만한 작품이 없다. 올해가 개봉 50주년이라서다. 그 얘기는 블록버스터의 역사가 50년이 됐다는 의미다. 시즌용 영화를 만들어 제작비 못지 않은 홍보를 하고, 개봉 첫 주에 최대한 많은 스크린을 확보하여 흥행 실패 가능성을 최소화하고, 흥행을 바탕으로 부가 판권 및 굿즈 사업도 진행하여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리는 영화 말이다. 최근 디즈니+에서 다큐멘터리 <죠스 @ 50: 전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됐다.

<죠스> 촬영 당시를 회고하는 1946년생 스필버그는 희끗희끗한 머리와 흰 수염이 가득한 초로(初老)이지만, 해당 영화를 찍을 때는 서른이 되지 않은 검은 머리 덥수룩한 젊은 감독이었다. 매사추세츠의 섬마을 마서스비니어드에서 <죠스> 촬영을 하던 스필버그는 매일 같이 불안감에 시달렸다. 실물 크기의 죠스 모형은 물속에만 들어가면 오작동했고, 실제 바다에서 이뤄진 촬영은 예측 불가한 기후와 가늠하기 힘든 물살의 세기 등등으로 하루에 한두 장면 촬영 OK가 전부였다. 각각 상어 전문가와 상어 사냥꾼을 연기한 맷 역의 리처드 드레이퓨스와 퀸트 역의 로버트 쇼는 경쟁의식이 과해 빈번하게 부딪혔다.



이건 스필버그가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스필버그는 <죠스>를 자신의 TV 영화 <듀얼>(1971)의 시퀄처럼 만들고자 했다. 정체불명의 트럭이 세일즈맨의 승용차를 쫓으며 위협을 가하는 설정이 지느러미만 물 위로 드러낸 채 무방비 상태의 인간을 공격하는 <죠스>와 닮아 있어서다. <듀얼> 때 그랬던 것처럼 세트 촬영을 원한 스튜디오의 뜻과 다르게 현장 촬영을 고집했고 전문 배우 8명을 제외하고는 마서스비니어드 주민들로 캐스팅 목록을 채웠다(그중에는 <죠스>의 원작 소설가 피터 벤츨리도 포함되었다).

당시 미국은 전역에서 이전과 다른 가치관이 기존의 규칙과 충돌하면서 새로운 질서(에 관한 욕구)가 생겼다. 정치 사회적으로 베트남전 참전과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이 지향하는 선(善)의 정체는 무엇인가에 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런 흐름 속에 스필버그와 같은 젊은 영화인은 프랑스의 누벨바그,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선배 감독들이 거리로 나와 투쟁하듯 영화를 찍었던 것처럼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와 현실과 호흡하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개봉 후 <죠스>의 야외 촬영과 비전문 배우 캐스팅은 다큐멘터리를 연상하게 하는 생생한 현장감으로 공포 효과를 높였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촬영 동안은 전쟁과 같았다.

예상한 촬영 기일을 넘겼고, 책정한 예산은 훌쩍 오버했고, 이러다 해고당하는 건 아닌지 불안했던 스필버그는 날마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신경안정제를 품 안에 챙기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복용했다. 걱정과 다르게 스필버그는 감독직을 유지하며 영화를 완성했고 <죠스>는 <대부>(1972)도, <엑소시스트>(1973)도 도달하지 못했던 1억 달러의 흥행 수익을 넘어선 최초의 영화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며 최종적으로 10억 달러 가까운 돈을 벌어들였다. 그러니까, <죠스 @ 50: 전설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제목 그대로의 내용이면서 할리우드의 흥행 공식을 바꾼 스티븐 스필버그 ‘신화’의 출발을 다룬다.



신화는 범상하지 않은 주인공에게 시련과 고통으로 시험에 들게 하면서 그걸 극복하는 과정을 극적인 사연으로 만들어 세상을 놀라게 한다. <죠스> 현장에서 인생 최악의 시기를 맛본 스필버그는 <죠스>의 기념비적인 흥행으로 세상의 왕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주변에서는 최고의 영화에 걸맞은 연출이라면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부추겼다. 스필버그는 우쭐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리자, 스필버그는 우울해졌다. 작품상 후보에는 올랐지만, 오스카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둥지로 날아갔다.

감독상은 <내쉬빌>의 로버트 알트만,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밀로스 포먼, <배리 린든>의 스탠리 큐브릭, <개 같은 날의 오후>의 시드니 루멧, <아마코드>(이상 1975)의 페데리코 펠리니에게 밀려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카메라는 얄궂게도 스필버그의 얼굴을 비췄고, 그는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아카데미의 처사에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1994)로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기까지 2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죠스>의 흥행으로 스필버그의 위상은 오스카 수상자 못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렇게 신화는 시작됐고 마침 한국에도 <죠스>의 50주년 재개봉이 8월로 확정됐다.

허남웅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