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에곤 실레를 품었다…손끝의 원시적 에너지로 그린 흑인의 초상

입력 2025-07-24 17:09
수정 2025-07-25 02:21

세계 미술계를 수년째 뒤흔들고 있는 흑인 스타 작가가 있다. 아모아코 보아포. 미술 시장과 학계에 '보아포 신드롬'을 불러온 그의 발걸음은 이제 미술관을 향하고 있다. 지난해 오스트리아 빈 벨베데레 전시에 이어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 '나는 여기 와본 적이 있어(I have been here before)'를 들고 한국에 왔다. 지난 19일 경북 경주 우양미술관을 찾은 그를 단독 인터뷰했다.


구불구불한 선으로 표현된 오묘한 피부, 이와 대비되는 화사한 톤의 배경과 눈부신 의상들, 그 배경을 더 빛나게 하는 오브제는 ‘보아포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의도적으로 어딘가 일그러진 얼굴은 모두 그의 손가락에서 나왔다. 붓 대신 손을 쓰는 채색 기법인 ‘핑거 페인팅’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아무리 많은 작품 속에서도 누구나 그의 그림을 쉽게 구별할 수 있는 이유다.벼락 스타? ‘21세기 고전’의 준비된 천재 보아포는 예술계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가장 주목받는 스타 작가가 됐다. 2018년 버락 오바마 초상화를 그린 주인공 케힌데 와일리가 인스타그램에서 그의 작품을 발견하고 자신의 갤러리에 그를 추천한 게 계기였다. 마이애미의 유명 컬렉터인 루벨 부부가 소유한 루벨미술관에서 레지던시를 하면서 보아포는 로스앤젤레스(LA)의 로버츠프로젝트, 시카고의 마리안 이브라힘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디올은 2021년 S/S 남성복 컬렉션에서 그와 협업했고,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블루 오리진 로켓’의 외부 패널에 그의 그림 세 점을 실어 우주로 날려 보내기도 했다. 2021년 12월 그의 작품 중 하나인 ‘Hands Up’은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340만달러(약 47억원)가 넘는 가격에 낙찰되며 그의 작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 파리 루이비통재단미술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워싱턴DC 허시혼미술관, 빈 알베르티나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2022년엔 세계 최대 갤러리인 가고시언의 선택도 받았다.

이쯤 되면 ‘벼락 스타’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교육받은 아프리카 이민 3세 정도 되는 것 아니냐’고.가나의 보아포, 클림트·에곤 실레와 조우 보아포는 1984년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태어났다. 어부인 아버지를 어릴 때 여의고, 여러 집을 돌며 가사도우미 일을 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런 그가 좋아한 건 그림이었다. 대학 진학 전까진 독학이 전부였다.

“친구들끼리 그림을 그리며 놀곤 했어요. 집안 형편도 그렇고, 가나에선 직업으로서 예술가가 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테니스로 돈 벌고, 은퇴하면 그림을 그리려고 했죠.”

테니스에도 재능이 있던 그는 볼보이로 시작해 선수 생활을 이어갔고, 몇 년간 세미프로 선수로도 활동했다. 그러다 어머니의 직장 동료가 아크라에 있는 가나타예술디자인대의 장학금을 내주며 새로운 길이 열렸다.

어떤 이들은 그의 그림 속 구도와 장식적 요소를 두고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틀리고 일그러진 표정에서 에곤 실레를 떠올린다. 실제로 그랬다. 보아포는 아크라에서 학사를 마친 뒤 2014년 빈으로 이주했다. 빈미술아카데미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며 수많은 빈의 유산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좌절의 시간도 길었다.

“빈은 예술적 유산이 살아 숨 쉬는 도시예요. 클림트와 실레의 작품 등에서 인물화의 구도, 섬세한 색채 구성, 생동감 넘치는 색채 등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동시에 ‘흑인’이어서 겪은 차별의 순간도 잊을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흑인 초상화를 그리면 ‘왜 이렇게 까맣냐’는 평을 들어야 했으니까요. 흑인을 그렸는데, 왜 이렇게 까맣냐니…. 더 밝게 그리라니….(웃음)”보아포가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소 모욕적이었던 순간들은 그의 작품 세계를 창조하는 영감이 됐다. 인종차별을 겪던 그는 ‘신체 정치(Body Politics)’ 연작을 그렸는데, 이는 초기작 중에서도 평단의 가장 높은 찬사를 받고 있다. 이 연작 중 하나는 작가가 프란츠 파농의 1961년 저서인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The Wretched of the Earth)>을 들고 있는 모습. 이 책은 식민주의가 개인과 국가에 미치는 비인간적 영향에 대한 것으로, 이 그림이 보아포를 미술계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보아포의 그림을 보면 한 인종을 그 오랜 시간 ‘블랙’이라 통칭해 온 단어가 얼마나 단순하고도 우매했는지를 깨닫는다. 보아코가 표현하는 피부색 안에는 짙은 갈색, 황토색, 보라색, 코발트블루, 모스그린, 옐로 등의 뉘앙스가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유영하듯 어우러진다.

“핑거 페인팅은 그리려는 것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물론 붓은 훨씬 더 통제하기 쉽고 매끈한 결과를 낼 수 있지만 손가락을 사용하면 단순한 움직임만으로도 엄청나게 강렬한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죠. 원시 인류가 사용한 제스처랄까요. 회화이면서도 조각적인 형상들은 양손이 있어 가능한 결과죠.”

그가 주로 사용하는 색채들에 대해 더 물었다. 피부색에 블루는 너무 과감한 것 아니냐고. “코발트블루로 시작해서 울트라마린블루까지 수많은 블루를 써왔습니다. 브라운 계열 색상은 내게 땅과 흙, 블루 계열은 생명과 빛으로 느껴져요. 인간의 초상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색이 또 있을까요.”“한국은 처음…‘와본 적 있다’고 말한 이유는…” 보아포는 한국 전시를 준비하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7월 20일 개막해 11월 30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는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의 공식 관람 일정에도 포함됐다. 그는 가나 출신 건축가 글렌 드로셰와 함께 공간 일부를 직접 설계했다. 그리고 전시에 이름을 붙였다. ‘나는 여기 와본 적이 있어’라고.

“한국의 수집가와 내 그림을 좋아하는 관람객들이 아트페어에서 열정적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여러 번 접했습니다. 아시아에 온 건 이번이 처음인데, 물리적으로 존재하진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연결된 것 같았어요.”

이번 전시는 네 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나는 응시하리라’에는 인물이 정면을 응시하는 강렬한 초상들이 놓였다. 집중적으로 눈을 맞춘 뒤 이어지는 ‘존재의 상태들’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살아 숨 쉰다. 가볍게 허리에 손을 올린 여성, 목뒤로 한 손을 걸친 남성까지 평범하지만 실재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자세와 포즈’ 섹션에선 더 과장된 위트와 과감한 스타일의 초상들이 펼쳐진다. 마지막 전시 공간인 ‘신성한 공간’은 드로셰와 함께 한옥의 마당 건축, 자수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Nsaa 파빌리온 안에 자리 잡았다.

흑인 초상화로 대표되는 ‘보아포 스타일’을 넘어 다른 장르와 재료에도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답은 명료했다. “나는 이미 조각가이자 추상화가입니다. 학교에서 조각과 추상미술을 배우면서도 나만의 스타일을 찾고 싶었어요. 핑거 페인팅은 점토에서 ‘더하기’와 ‘빼기’를 하는 것과 같은데 그게 내겐 조각이면서 또 건축이기도 합니다. 피사체를 두고 배경을 상상한 뒤 추상화를 거치기도 하고, 일부 오브제는 정물화 구도를 가져오죠. 어쩌면 내 구상회화 안에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경주=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