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한 여성 화가의 전시에 60만 명이 몰려들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꽃처럼 펼쳐진 기하학적 형상과 선명한 색채 앞에서 사람들은 조용히 발걸음을 멈췄다. 어떤 이들은 눈물을 터뜨렸다. 뉴욕 화단은 “이전에 본 적 없던 회화”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화가는 한창 떠오르는 신예가 아니라 바실리 칸딘스키나 피터르 몬드리안보다 앞서 추상을 시도한 작가였다. 이름은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 대다수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여성이었다.칸딘스키·몬드리안 앞섰다
지난 100년의 미술사는 추상 영역에 도달한 최초의 화가로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을 꼽았다. 칸딘스키가 ‘완전 추상화’를 그린 시점은 1911년, 몬드리안이 명확한 수직, 수평선만 남긴 채 캔버스에 모든 요소를 지워버린 시점은 1914년 즈음이다. 반면 아프 클린트가 자신의 첫 추상 작품으로 평가되는 ‘태초의 혼돈’을 그린 시기는 1906년이다. 두 거장을 분명 앞선다.
그림은 존재하는데, 왜 아프 클린트의 이름은 지워졌던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미술사란 게 원래 편협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간의 미학과 담론은 서유럽·백인·남성의 시각에서 전개됐다. 이 단선적 구조에 편입되지 못한 이야기들은 배제되고 잊혔다. 아프 클린트는 귀족 가문에서 나고 자란 백인이지만 주류 미술계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시 예술의 중심지인 서유럽이 아니라 ‘변방’ 스웨덴 출신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아프 클린트가 스스로를 감춘 탓도 있다. 그는 1908년 독일의 저명한 신지학자인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자신의 추상 연작을 보여줬다. 그러나 슈타이너는 “앞으로 50년간 누구도 이 그림을 봐선 안 된다”는 충격적인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떴다. 감히 여성이 도발적인 그림을 그려서였는지, 당시 인식으론 추상화를 인정할 수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프 클린트는 194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작품을 숨겼고, 또 사후 20년간 추상 작품을 공개하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다.을숙도 상륙한 아프 클린트의 추상
아프 클린트의 그림이 조명된 것은 잊힌 미술사를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단초다. 그의 그림은 1986년 일부 작품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카운티 미술관 전시에 출품돼 세상에 나왔다. 2013년 고국인 스웨덴 스톡홀름 현대미술관이 ‘추상미술 개척자’라는 제목을 걸고 그의 작품을 선보였다. 북유럽에서 차츰 그의 이름이 회자됐고, 독일을 거쳐 뉴욕까지 상륙하게 된 것이다.
지금 부산 을숙도에 가면 그의 대표작을 직접 볼 수 있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 전시가 열리면서다. 앞서 일본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을 다녀온 순회전이다. 그의 이름을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첫 전시라 의미가 크다. 힐마아프클린트재단과 협력해 회화부터 드로잉, 기록 등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담은 139점을 소개한다. 나선이 소용돌이치는 형태가 돋보이는 ‘태초의 혼돈’을 비롯해 아프 클린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10점의 대형 회화’ 연작 등 주요 작품이 모두 걸렸다. 10점의 대형 회화는 작가가 유년 시절부터 이어진 자신의 삶을 추상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인간 생명의 흐름과 의식의 진화에 대한 사유가 집약돼 있다. 세로 3m가 넘는 거대한 크기에 압도된다.‘추상 선구자’ 신화의 함정 경계해야
아프 클린트가 가장 앞선 시기에 순수 추상에 가까운 회화를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추종하는 건 위험하다. 아프 클린트는 신지학과 영매술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생전 참여한 강령회 모임에서 신적인 존재로부터 그 가르침을 담은 그림을 그리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일종의 ‘메신저’로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종교적 계시를 시각화했다.
이런 관점에서 아프 클린트의 그림 속 모호한 상징체계와 비밀스러운 숫자 등은 회화적으로 통용된다기보다 일종의 사적 기호학에 가깝다. 아프 클린트는 재발견돼야 마땅하지만, 어쩌면 동시에 재고돼야 할 예술가다. 단순히 ‘누가 먼저였나’를 따지는 연대기 게임이 아니라 그의 예술이 동시대 미술에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이번 전시를 끝으로 한동안 휴식에 들어간다는 소식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전시는 10월 26일까지다.
부산=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