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시흥시의 한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는 퇴직자들을 65세까지 촉탁직(퇴직 후 재고용)으로 계속 쓰는 게 관례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수십 년간 일하며 기술을 익힌 숙련공을 대체하기 어려운 데다 어차피 청년은 들어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생산라인이 쉴 새 없이 돌아가다 보니 외국인을 뽑아 교육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퇴직자를 다시 불러들이는 ‘재고용’ 기조는 통계로도 뚜렷이 확인된다. 22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재고용 제도를 운용 중인 사업장(14만7402개) 가운데 퇴직자의 80% 이상을 재고용하는 ‘완전 재고용’ 사업장은 3만4712곳(23.5%)에 달했다. 2년 전(2만6395개)과 비교하면 8000곳 넘게 늘어났다. 특히 인력난이 심한 제조업에선 완전 재고용 비율이 32.1%로 높았다. ◇ 선(先)정년연장 추진하는 정부퇴직 후 재고용이 제조업에서만 이뤄지는 건 아니다. 금융대기업 B사는 퇴직 예정자 중 핵심 인력을 ‘전문역’으로 전환해 최대 3년간 재고용하고 신입 교육 임무를 맡겼다. 임금피크제로 정년 직전 급여가 낮아져 계속 고용해도 급여 부담이 없다. 퇴직 근로자는 더 일할 수 있고, 신입 직원들은 숙련자의 실무 경험을 배울 수 있어 만족도가 높다.
이처럼 현장에서 자율적 재고용이 확산하는데도 정부는 업종별·기업별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 정년 연장을 고집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용부는 올 하반기 ‘고용상 연령차별금지법’을 개정해 정년을 국민연금 수급 개시연령에 맞춰 연장한다는 계획이다.
경영계는 정년 연장을 위해서는 임금체계 개편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부는 세부 임금체계와 고용 조건은 노사 간 협의에 맡기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정년을 60세로 올리면서 기업 부담이 크게 늘어난 2013년 ‘실패 사례’가 되풀이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당시 정부는 법정 정년 연장을 도입하면서 기업 부담을 덜어주는 차원에서 임금피크제를 추진했지만 노동계 반발로 입법화하지는 못했다. 이후 정부 권고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들은 줄소송(임금피크제 무효 소송)을 당해 예기치 못한 피해를 봤다. ◇ 청년 일자리 위축 우려일률적 정년 연장이 청년 고용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높다. 한국은행이 지난 4월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임금체계 개편 없는 정년 연장으로 고령층 근로자가 1명 증가할 때 청년 근로자는 0.4~1.5명 줄어들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지난 15일 경영·경제·법학과 교수 21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고령자 고용정책 인식조사’에서도 전문가의 62.4%가 ‘청년층 채용 위축’을 가장 우려되는 문제로 꼽았다. ‘낮은 생산성 대비 높은 비용’(43.8%), ‘세대 갈등’(23.8%) 순으로 뒤를 이었다.
경영계는 고용시장 왜곡을 막기 위해 일본처럼 기업에 선택권을 주는 방식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은 기업에 65세까지 고용 확보 의무를 부여했지만 계속고용(퇴직 후 재고용), 정년 연장, 정년 폐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2024년 기준으로 고용 확보 조치를 실시한 일본 기업은 99.9%에 달했다. 그중 계속고용을 택한 기업이 67.4%였고, 정년 연장을 선택한 기업은 28.7%, 정년 폐지는 3.9%에 그쳤다.
김위상 국민의힘 의원은 “현재 산업 전반이 자연스럽게 재고용 흐름으로 가고 있는 만큼 업종별·기업별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정년을 일률적으로 늘리는 것만 고집할 경우 국가가 부담해야 할 고령자 보호 의무를 기업에 떠넘겨 산업계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