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계에는 더 이상 '해외파'라는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다. 세계 최고 무대에서 실력을 증명한 한국 연주자들의 수가 많고, 이들이 고국을 찾아 선보이는 공연 또한 이미 세계적 수준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2025년 평창 대관령 음악제(예술감독 양성원)의 프로그램 중 하나인 <고대의 찬가, 현대의 리듬>이 오는 7월 25일 평창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의 본 공연을 앞두고, 지난 19일 부천 아트센터에서 먼저 관객을 만났다. 경기도 부천시와 강원도 평창군, 두 지역 문화재단의 협업으로 성사된 이번 프리뷰 콘서트의 프로그램은 고대 영국의 성가를 모티브로 한 작품부터 재즈풍의 미국 음악과 러시아 작곡가의 신고전주의 발레 음악까지, 시간과 양식을 넘나드는 네 작품으로 구성됐다.
공연이 시작되고 지휘자 양성원과 동양인 최초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종신 여성 악장 이지윤이 단원들과 함께 무대에 입장했다. 첫 곡을 시작하기 직전 1·2 바이올린 파트의 악보가 뒤바뀌어 있는 소소한 해프닝이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무대를 가로질러 서로의 악보를 건네는 순간, 양성원은 “연습은 다 했습니다”라는 재치 있는 농담으로 객석의 웃음을 끌어냈다.
첫 곡은 본 윌리엄스의 <토마스 탈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이었다. 16세기 영국 작곡가 토마스 탈리스의 성가를 바탕으로 한 이 곡은, 두 개의 현악 오케스트라와 현악 사중주가 각기 분리되어 앉는 3중 앙상블 구조로 구성됐다. 고대 교회 음악 특유의 고요하고 장중한 울림 속에서, 현악 주자들의 솔로가 성령 충만한 느낌을 자아낸다. 특히 앉은 자세에서도 몸을 깊이 웅크렸다 펴기를 반복하며, 모든 파트의 단원을 강력하게 이끈 악장 이지윤이 제시한 주제는 비올라 수석 유리슬을 거쳐, 첼로 수석 이정란과 2 바이올린 수석 이은주에게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각 파트 수석 주자들이 솔로 연주하는 동안, 옆자리에 앉은 부수석 주자들이 파트의 중심을 안정적으로 지켜냈다. 경기필하모닉 악장 이윤의, 프랑스 메츠 오케스트라의 고병우(크리스토퍼 고) 등이 제 몫을 해냈고, 경기필하모닉의 수석 베이시스트 추대희는 다른 파트 연주자들의 움직임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무대 위에 깊이 있는 울림을 가득 채웠다.
두 번째 곡은 브리튼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밤과 죽음을 주제로 한 여섯 편의 영시에 곡을 붙인 <테너와 호른, 현악기를 위한 세레나데>. 이 작품은 테너와 호른, 현악기의 밀도 높은 호흡이 요구된다. 협연자로 나선 영국 출신 테너 로빈 트리칠러는 지난 5월 서울 예술의전당이 손수 제작해 세계 초연한 오페라 <The Rising World:물의 정령>에서 시계 장인의 제자 역으로 출연해 국내 관객에게 익숙한 성악가다. 포르투갈 출신 호르니스트 리카르도 실바 역시 한국의 오보이스트 함경과 함께 실내악 퀸텟을 구성해 활동 중인 친한파 연주자다.
무반주 호른의 솔로로 시작과 끝(프롤로그,에필로그)을 알리는 이 곡에서 실바는 밀도 높은 호흡으로 불어내는 정제된 사운드를 들려줬고, 리릭 테너 트리칠러는 가곡과 오라토리오(종교 음악) 무대에서 활약을 기대하게 만드는 맑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여섯 곡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풀어냈다. 다만 4번 곡 Elegy(비가)를 연주하는 트리칠러가 무섭고 슬픈 표정으로 감정을 잡고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자막이 5번 곡 Dirge(장송곡)로 잘못 표기돼 관객의 몰입이 잠시 흐트러진 점은 아쉬웠다. 그럼에도 무대 위 연주자들이 그려낸 서정적이고 고요한 분위기, 무대 밖(off-stage)에서 들려온 실바의 에필로그 연주가 작품 특유의 목가적인 인상을 잘 살려냈다.
15분간의 인터미션 후 미국 작곡가 아론 코플랜드의 <클라리넷 협주곡>이 이어졌다. 이 곡은 재즈 클라리네티스트 베니 굿맨의 위촉으로 탄생 작품으로 클래식과 재즈의 하이브리드 구조가 특징이다. 협연을 맡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채재일 교수(클라리네티스트)는 1악장의 첫 선율을 연주하며 클라리넷을 원형을 그리듯 회전시켰다. 이는 마치 음향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확산하는 듯한 시청각적 효과로 이어졌다. 채재일은 자유로운 카덴차와 현란한 기교, 싱코페이션(강 박 대신 약 박에 강세를 주는 당김), 오프비트(약 박 리듬 강조로 음악의 뒤틀림 유도)를 타는 재즈의 기교와 리듬을 통해 감각적인 무대를 완성했다. 본 무대가 끝이 나고, 끊이지 않는 박수에 커튼콜을 반복하던 채재일은 벨라 코바치의 '마누엘 드 파야의 오마주'를 앙코르로 연주했다.
이날 메인 프로그램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이탈리아 작곡가 페르골레의 선율을 바탕으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재탄생시킨 <풀치넬라 모음곡>이었다. 이 곡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다시 한번 악장 이지윤의 움직임이었다. 그는 등과 의자 사이에 한 사람쯤 앉을 수 있을 만큼 공간을 두고, 온몸으로 리듬을 이끌며 앙상블을 밀고 당겼다. 특히 3번 악장에서 선보인 더블 스탑 솔로는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기량을 자랑하는 솔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양성원 예술감독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 무대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영국 고음악과 20세기 현대음악을 하나의 호흡으로 엮어냈다. ‘고대의 찬가, 현대의 리듬’이라는 부제처럼,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는 진정성 있는 해석이 돋보였다.
건축 음향이 좋기로 소문난 부천아트센터는 고딕 양식 성당에서 울려 퍼져야 할 곡도, 발레 극에서 유래한 음악도 온전하게 전달될 만큼 안정적인 음향을 제공하며 이번 공연을 담아냈다. 오는 7월 25일 평창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상연되는 이 공연은, 지금 한국의 연주자들이 어떤 수준의 음악을 만들어내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답변이 될 것이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