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아코 보아포가 가나 아크라에서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이주해 한창 작업에 몰두하던 시절. 아직 무명이었던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본 갤러리스트가 있었다. 파리와 시카고, 멕시코시티에 자신의 이름을 건 갤러리 3곳을 운영하고 있는 마리안 이브라힘이다.
아모아코 보아포의 아시아 첫 미술관 전시를 계기로 지난 7월 경주 우양미술관을 찾은 이브라힘은 "나는 진정한 노마드"라고 먼저 소개했다. 노마드의 뜻 역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어디에나 속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런 이브라힘과 보아포를 이어준 건 뜻밖에 인스타그램이었다. 그의 그림을 처음 본 순간, 강렬한 느낌이 왔고, 보아포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그는 보아포 외에도 조라 오포쿠, 피터 우카 등 흑인과 흑인 이주민 예술가 20여 명을 전속으로 두고 북남미와 유럽 대륙에서 활발하게 전시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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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라힘은 미술계에서 '아프리카의 예술을 세계에 알린 여성'으로 통한다. 14년 전 시애틀을 시작으로 파리, 멕시코시티까지 보폭을 넓혔다. (현재 시애틀 갤러리는 시카고로 이주했다.)
이브라힘은 뉴칼레도니아의 주도인 누메아에서 태어나 5살 때까지 살았고, 아버지는 니켈 수출 회사에서 일했다. 향수병을 앓던 어머니의 권유로 가족은 부모님의 고향인 소말리아로 이사했지만, 곧 전쟁이 임박해져 프랑스 보르도로 또다시 떠나야 했다.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런던 미들섹스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뒤 파리 광고 업계에서도 일했다.
“처음엔 수집가로서 현대 미술계에 입문했지만 왜 내가 찾는 그림은 갤러리나 미술관에 없을까 계속 질문했어요. 물론 저는 여러 세대에 걸쳐 미술 딜러나 컬렉팅을 해온 사람이 아니었죠. 그게 장벽이면서 장점이기도 했어요. 당시 이 분야에 다양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내가 싸워야할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아챘죠.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럽인 예술가들이 창조하는 모든 것에 이끌렸습니다.”
그는 아모아코 보아포를 마이애미 루벨 컬렉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이끌고, 마이애미 바젤에서 솔로 부스를 선보여 단숨이 판을 바꿨다. 한번 보면 잊기 어려운 보아포의 작품을 세계 무대에 데뷔시킨 셈이다.
“초상화와 흑인, 두 영역 모두 기존 미술계에 충격을 준 요소였던 것 같습니다. 초상화에 혁명을 일으키는 것, 그리고 미술사에서 소외되거나 저평가됐던 '흑인 문화'를 보여주는 것 둘 다죠. 보아포의 그림은 형식상 클래식에 가깝지만, 거기에 쓰이는 색채나 오브제 등의 요소들은 현대적이에요. 그런 것들이 중첩되면서 다른 동시대 흑인 예술가들에게도 기회의 문이 열린 셈입니다.”
파리와 런던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그가 미국 시애틀에 첫 갤러리를 열게 된 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영향이 크다. "똑똑하고 아름다운 흑인 남성이 나의 대통령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남편도 일하고 있던 시애틀에 갤러리를 연 이유였죠."
그는 2019년 이 갤러리를 시카고로 옮겼다. 왜 뉴욕이 아니고 시카고였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뉴욕이 미국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변화가 일상이고 쉴새없이 경쟁해야 하는 뉴욕보다 더 미국다운 도시는 시카고였습니다. 라틴계, 흑인, 동유럽 등의 이민자 인구가 적절한 비율로 섞여 있는 데다가 건축의 역사나 산업적, 문화적 뿌리가 깊고 단단하죠. '제 2의 고향'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한 가지가 비어있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도시에 갤러리가 별로 없었습니다. 내가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죠."
이브라힘은 여전히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진보란 '함께 손잡고 성장하는 것'이다. 각자 구석에 갇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닌 '둘 다'를 의미한다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지금도 미국에 갤러리를 계속 운영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것이 평평하고 흑백이었던 옛날, 마치 중세시대로 돌아가려는 것 같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미국에 머무르며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고 느낀다"고 했다.
이번 경주에서의 아모아코 보아포 전시를 두고 "한국의 관람객과 미술계 사람들은 보아포의 작품에서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도시에 '스위스 어느 작가'처럼 그 동안 서구 중심의 주류 예술계에서 주목받아온 이보다 공통분모가 더 많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큐비즘은 아프리카에서 영감을 많이 얻었고, 인상주의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렇게 문화를 서로 주고 받으며 중심과 주변 사이에서 균열을 내는 일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경주=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