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뒤 미래의 유물을 창조하는, 다니엘 아샴

입력 2025-07-31 00:03
수정 2025-07-31 09:13


‘어떤 예술가인가’라는 물음에 미국에서 온 작가 다니엘 아샴은 ‘상상의 고고학자’라고 답한다. 예술은 박제된 기억이 되고, 기억은 침식된 유물이 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래서일까. 그가 빚는 오브제를 마주하면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게 된다.

존재는 세월 앞에 유한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형태는 닳고, 색은 바래기 마련. 어느 순간 이름까지 잊힌다. 떠올려 보자. 밀로의 비너스는 두 팔이 없는 채로 서 있고, 황동빛의 위용을 자랑했다던 자유의 여신상은 140여 년의 호흡 끝에 청록색으로 산화했다. 신라 시대 얼굴무늬 수막새는 반쯤 얼굴을 잃은 채 흙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유한하다고 해서 언제나 소멸로 마침표를 찍는 것은 아니다. 퇴색과 상실은 때때로 본질을 더 또렷하게 드러낸다. 사람들은 이를 예술이라 부르고, 예술을 담은 그릇을 유물이라 이름 붙인다. 사라진 팔의 모습을 상상하며 새삼 비너스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색깔에 아랑곳 않고 자유의 의지 되새기며, 반쪽짜리 얼굴에서 은은한 ‘천년의 미소’를 발견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 현대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 다니엘 아샴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는 자신의 조각과 오브제를 부수고 침식시켜 현재를 옛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지금의 사물이 미래의 유물로 남았을 때, 그 안에도 여전히 예술적 가치가 담겨있을까’라는 질문이 시작점인 것. 유년시절 미국 마이애미를 강타한 허리케인으로 살고 있던 주택이 파괴되고 관념만 남아 있던 집이라는 공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반복된 해체와 재구축의 기억이 아샴의 예술적 토대가 됐으리라 짐작해볼 뿐이다.

서울 청담동 페로탕 서울에서 열리는 다니엘 아샴의 개인전 ‘기억의 건축’에선 이런 아샴의 예술적 세계관을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작가 특유의 미적 개념인 ‘상상의 고고학(Fictional Archaeology)’을 회화와 조각, 드로잉으로 풀어냈다. 전시에 나온 작품들을 두고 페로탕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고대 조각을 연상시키는 형상과 현대 문명의 오브제가 공존하는 작품들은 마치 미래 고고학자가 발굴한 유물처럼 다가옵니다.”




1980년 미국에서 태어난 아샴은 쟁쟁한 현대미술계에서도 이른 나이게 두각을 드러낸 작가로 손꼽힌다. 이미 미국 뉴욕은 물론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 등 세계 각지 유수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작품활동을 선보여 왔다. 활동 영역은 미술에 머물지 않는다. 퍼렐 윌리엄스(음악), 디올(패션), 티파니(주얼리), 포르쉐(자동차) 등 글로벌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아 협업하는 등 럭셔리 라이프스타일 전 영역에서 자신의 미감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

그는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작가다. 2017년 페로탕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가졌고, 지난해엔 서울 신천동 롯데뮤지엄에서 출품작만 무려 250여 점에 달하는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회고전 당시 1000년 후인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로마 조각상을 내놔 화제였다. 한국을 배경으로 자신의 ‘상상의 고고학’을 펼친 작업을 선보이면서 아샴의 미학에 익숙해진 젊은 미술 애호가들이 많다.

지난해 롯데뮤지엄 전시에 비하면 페로탕 개인전의 규모는 다소 옹색할 수 있다. 출품된 작품이 몇 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도 다시 발걸음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부터 지속되고 있는 아샴의 가장 최근 작품들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상상의 고고학’이 어디쯤, 어떻게 왔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장소인 셈이다.



전시에서 눈에 띄는 작품은 ‘Amalgamized Venus of Arles’(2023)이다. 2m 높이에 달하는 조각상으로, 아샴이 루브르박물관에서 수 년 간의 레지던시 생활을 하며 제작한 작품. 고대 조각상을 1대1 비율로 재현한 루브르의 수많은 석고상 복제 컬렉션을 자유롭게 눈에 담아 완성한 결과물이다.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조각상 같지만 아샴답게 석고 물성이 아닌 고광택 스테인리스 스틸, 마치 수 백년 간 녹슨 것처럼 산화 처리된 청동, 따뜻한 색감으로 연마된 청동을 재료로 삼은 게 흥미롭다. 지중해에서 갓 건져 올린 듯한 질감을 보여주면서도 고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재료를 통해 독특한 조형적 긴장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산화된 청동과 스테인리스 스틸의 반듯한 경계는 마치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층위를 시각화한 것처럼 다가온다.

이보다 눈여겨볼 작품은 올해 새롭게 선보인 흉상 연작 중 하나인 ‘Stairs in the Labyrinth’(2025)이다. 어쩌면 그간 아샴이 선보였던 작업 중에서도 가장 독특하다 할 수 있다. 주조 방식으로 제작된 ‘캐스트샌드’ 모래조각인 이 작품들이 흉상에 대한 역사적 전례를 참조하면서도 동시대적 사고, 디지털 시대의 제작 기술을 보여주는 요소를 도입해 완성됐단 점에서다. 핸드 드로잉으로 조각을 구상한 다음 디지털 렌더링과 컴퓨터를 활용한 3D 프린팅을 통해 입체적으로 구현했다. 고대성과 현대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 작업이다.



작품은 여성의 두상 안에 요르단의 보물 페트라처럼 고대 건축물 같은 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미로처럼 얽힌 구조와 그 속을 오르내리는 몇몇 인간들의 모습은 마치 네덜란드 판화 거장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상승과 하강’(1960)을 보는 것 같다.

이를 두고 마이클 달링 전 시카고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는 “고전 조각상이 우아함을 암시하는 동시에 르네 마르트와 에셔에게 영감 받은 인식의 퍼즐로 작품을 전개한다”면서 “건축적 디테일이 인간의 형상을 도발적으로 뚫고 지나가며, 이는 세밀한 관찰을 유도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캐스트샌드 작품들은 잠재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향후 수년간작가 작업의 주요 탐구영역이 될 것으로 보인다.”

고대성과 현대성이 교차하는 아샴의 작업은 향후 현대성과 미래성의 교차로 진화할 예정이다. 전시장 한켠에 일본풍의 분재 화분에 오디오 스피커를 결합한 습작이 이를 암시한다. 자세히 보면 소나무처럼 보이는 나무의 잎이 소리를 전달하는 구리선이다. 낭만주의와 팝아트 사이에 자리한 장난스러운 그의 세계관은 고고학자에서 미래학자로 바뀌고 있는 지도 모른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