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 1기 내각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에서도 어김없이 '주적(主敵)'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30년 넘게 반복돼온 해묵은 논쟁이지만, 한반도가 여전히 군사적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만큼 논쟁이 일 때마다 정치권의 최대 이슈로 부상하는 분위기다.◇ 청문회 필수 질문…"북한 우리 주적이냐, 아니냐?"정치권에 따르면 이번 주 인사청문회 기간 주적 논란이 불거진 것은 16일 진행된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 15일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 14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다. 이들은 '북한이 우리 주적이냐'는 야당 위원들의 대북관 질문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먼저 김영훈 후보자는 '대한민국의 주적은 누구냐'는 야당 위원 질의에 "대한민국을 위태롭게 하는 세력"이라며 "전날 통일부 장관(후보자)이 '북한은 주적이 아니다'라고 한 말에 동의한다"고 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명확한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며 질타했고, 김 후보자는 "국방부 장관께서 '북한군'이 주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에도 동의한다"고 진화했다.
권오을 후보자도 같은 질문에 "지금 이 시점에서 (북한을) 주적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참 애매한 점이 있다"고 말해 비판을 샀다. 그는 "북한이 무력을 쓰면 즉시 응징하되, 우리에 대해 험한 말을 한다고 해서 맞대응하고 말로써 긴장을 고조시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했으나, 야당 위원들이 재차 반발하자 "부적절한 표현에 대해 사과한다"고 했다.
정동영 후보자는 북한이 주적이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비교적 선명한 입장을 드러냈다. 그는 북한을 주적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면 북한은 주적이 아니고 우리의 적도 아닌 것이냐'는 물음에는 "위협"이라고 규정했다.
주적은 북한이라고 명확히 답한 후보자는 안규백 국방부 장관 후보자, 정성호 법무부 장관 후보자 정도뿐이었다. 정성호 후보자는 '대한민국 주적이 어느 나라라고 생각하느냐'는 곽규택 국민의힘 의원 질의에 "북한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곽 의원은 "감동했다"고 했다. 안 후보자도 "우리 주적은 북한이다. 북한은 6·25 전쟁 이후에 호시탐탐 우리를 노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30년째 'ing'…논란 언제부터?
북한군을 '주적'으로 규정하는 개념은 1994년 남북 특사교환 실무접촉에서 북측 대표 박영수가 "전쟁이 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된다"고 위협한 발언을 계기로, 1995년 국방백서에 처음 명기됐다. 이후 2000년까지 해당 표현이 유지되다가, 2003년 국방백서에서 주적 문구가 삭제되었고, 2004년 백서부터는 '직접적 군사 위협'이나 '현존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 등으로 표현이 변경됐다.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계기로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적'이라는 표현이 다시 담겨 박근혜 정권까지 유지됐으나,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8년과 2020년 국방백서에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는 표현이 사라졌다. 당시에는 '주권, 국토, 국민, 재산을 위협하고 침해하는 세력을 우리의 적으로 간주한다'는 문구로 대체됐다.
이어 2022년 윤석열 정부 국방백서에서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 표현(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 2016년 이후 6년 만에 부활했다. 윤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이던 지난 1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주적은 북한"이라는 짧은 글을 올려 보수층 결집을 유도하기도 했다.◇ 피식대학은 했는데, 文은 못했었다…주적 발언 재조명
후보자들의 청문회가 한 주를 강타하면서 과거 같은 논란이 불거졌던 사례들도 재조명됐다. 정치권에서 크게 논란이 됐던 대표적인 사례로는 2017년 19대 대선 당시 열린 대선후보 초청 TV 토론회가 꼽힌다.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북한이 주적이냐'는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의 질문에 "그런 규정은 대통령으로서는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해 보수 진영으로부터 맹비판을 받았다.
당시 유 후보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문서에 북한군이 주적이라고 나오는데 대한민국 국군 통수권자가 주적을 주적이라고 못한다. 그거 말이 되겠냐?"고 재차 따졌고, 이에 문 후보는 "대통령 될 사람이 해야 될 발언은 아니라고 본다"고 되풀이했다. 문 후보가 '주적은 북한'이라고 발언하지 못해 이슈가 됐다면, 반대로 주적은 북한이라고 자신 있게 발언했다가 논란의 중심에 선 사례도 있다.
270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한 인기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Psick Univ' 출연진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2023년 말 올린 영상에서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다. 3대 세습을 일삼고 있는 저 김씨 일가, 북한 놈들이 잘못이다. 대한민국에서 이 말을 왜 못해", "3대 세습 철폐하라" 등의 발언을 했다가 일부 네티즌들로부터 "국짐(국민의힘 비하 표현), 2찍(윤 전 대통령 지지자 멸칭)" 등 비난을 받은 바 있다.
한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한국을 '제1의 적대국', '불변의 주적',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설정했다. 2023년 헌법 개정에서는 통일 표현을 삭제하고 주적으로 교육한다는 내용을 반영하라고 직접 주문했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