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란 누군가를 마음에 새겨 넣는 일 [고두현의 아침 시편]

입력 2025-07-18 00:45
수정 2025-07-18 09:04



한여름
고두현

남녘 장마 진다 소리에
습관처럼 안부 전화 누르다가
아 이젠 안 계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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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손글씨로 여러 번 써 보았습니다. 한 글자, 한 구절, 천천히 음미하며 옮겨 적었습니다. 수십 번을 따라 쓰는 과정에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래, 필사란 누군가를 마음에 새겨 넣는 일, 그 속으로 가장 깊이 들어가는 것이구나!

이렇게 쓴 육필시로 표지를 장식한 필사책이 탄생했습니다. 제목은 『고두현 따라쓰기-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처음책방 펴냄)입니다. 이 책을 펴낸 ‘처음책방’의 주인은 김기태 시인입니다. 1세대 출판평론가이자 세명대 교수인 그는 근현대 희귀도서 초판본과 창간호 수만 권을 모은 서점 ‘처음책방’의 설립자이지요.

그가 서점에 이어 출판까지 직접 하기로 마음먹고 준비한 기획이 ‘처음책방 필사책’ 시리즈입니다. 올 3월 『김소월 따라쓰기』, 『김영랑 따라쓰기』, 『윤동주 따라쓰기』, 『박인환 따라쓰기』를 동시에 선보였고, 5월에는 『장석주 따라쓰기-큰 고니가 우는 밤』을 출간했습니다. 이번에 나온 『고두현 따라쓰기-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은 이 시리즈의 여섯 번째 책입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 필사책은 “시를 쓰듯, 시를 읽듯, 시를 따라 쓰는 마음의 길 위에 놓인 한 권의 노트”입니다. 좀 쑥스럽긴 하지만, 출판사 측의 책 자랑을 몇 구절 옮깁니다.

“이번 책은 우리 시단에서 깊고 넓은 물결을 이루어온 고두현 시인의 손끝에서 길어 올린 언어들로 채워졌습니다. 1993년 등단 이래, 서정의 빛과 그림자를 한 줄 한 줄 새기며 30여 년간 한국 시의 한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고두현 시인. 이 책은 그가 직접 고른 시편 78편을 담은 시선집이자, 독자가 자신의 손으로 시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필사의 여백입니다.

‘필사는 누군가의 마음을 가장 깊이 들여다보는 일’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이 책은 시인의 마음을, 그 언어의 떨림을 손끝으로 더듬어 가는 시간입니다. 시 한 편을 따라 쓰는 동안 우리는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잊고 지내던 나의 내면과 조용히 마주하게 됩니다.

이 책은 단지 시를 베껴 쓰는 도구가 아닙니다. 문학과의 재회이며, 사유의 깊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의식입니다. 말로 다 닿지 못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날, 그 마음을 시의 한 구절에 담아보세요. 그 순간, 한 줄의 시가 당신의 마음을 대신해줄지도 모릅니다.”

참, 책 표지의 ‘한여름’에 얽힌 사연은 이렇습니다. 원래 30행짜리였는데 줄이고 줄였더니 3행이 됐습니다. 제목도 수식어 없이 한 단어로 줄였지요.

이 시에서 ‘안 계시지……’의 주인공은 어머니입니다. 외환위기 때 먼 길 떠나고 난 이듬해 여름이었죠. 남부 지방에 큰비 오고 장마가 진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지역 번호 055를 누르고, 다음 번호를 누르다가 생각이 났지요. 아, 참, 이젠 안 계시지…….

어머니의 부재를 통해 어머니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빈자리가 커 보일수록 애틋함도 커진다고 하지요? 어머니의 삶이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우리 가족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의 작은 절집 곁방에서 생활했습니다. 어쩌다 절집으로 들어가게 됐을까요.

아버지가 북간도부터 시작해서 객지로 떠돌다가 병을 얻은 뒤 식구를 이끌고 귀향했기에 궁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몸도 편한 날이 없었지요. 온 가족이 벼랑 끝에 몰렸습니다. 우연히 금산 절에 갔던 어머니가 생기를 회복한 것을 계기로 아예 삶터를 옮기게 됐지요.

어머니는 한동안 허드렛일을 겸하는 공양주 보살로 살았습니다.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어중간한 삶이었지요.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에 입학한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처의 고등학교로 떠나자 어머니는 이제 됐다 싶었던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셨습니다. 이후 남해 물건리에 있는 미륵암에 자리를 잡았지요. 물건리는 지금의 ‘독일마을’입니다.

그곳 암자는 방풍림과 너른 들판 가운데에 있습니다. 저는 방학 때마다 기숙사에서 이곳으로 ‘귀가’했습니다. 어렵사리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이곳에서 ‘어머니 스님’이 보내 주는 쌀로 자취생활을 했지요.

신문사에 취직해 햇병아리 기자 때 받은 ‘늦게 온 소포’도 이곳에서 어머니가 보내 준 것이었습니다. 이미 속세를 떠난 사람이 속가의 아들에게 사사로이 보낸 소포와 편지, 사회 초년병으로 아등바등하던 그때, 남해산 유자 아홉 개를 싸고 또 싸서 서울로 보낸 속 깊은 마음이라니!

그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제 곁에 현재형으로 살아 계시며 자주 등을 다독거려 주십니다. 한 편 한 편 살아있는 시를 쓰라고, 향기 깊고 여운이 오래 남는 글을 쓰라고…….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