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란 무엇인가. 백지상태의 한 생명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원초적인 세계다. 세기의 작곡가나 화가의 고향에 수백만의 인파가 모이고, 나라의 보물로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독일에 베토벤, 프랑스에 라벨이 있다면, 체코엔 드보르자크, 말러, 야나체크가 처음 마주한 우주가 있다. 전설들의 궤적을 따라가 봤다.
드보르자크에 '음악가'·'철도광' 운명을 선물한 마을 넬라호제베스
드보르자크의 고향은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북쪽으로 35km 정도 떨어진 보헤미아의 작은 마을 넬라호제베스다. 낡은 기차역을 빠져나와 조금만 걷다 보면 흰색 외벽에 붉은 지붕을 덮은 2층짜리 건물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블타바강 옆에 자리한 이 집은 1841년 9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드보르자크가 12살이 되던 해인 1853년 학업을 위해 인근 마을 즐로니체로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2층은 세입자를 들였기에, 드보르자크 가족은 1층에서만 지낼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거의 모든 방이 아버지의 선술집 사업을 위해 사용됐고, 드보르자크 가족은 단 두 개의 방에서 살을 부대끼며 살아야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독특한 주거 형태가 드보르자크에겐 음악적인 호기심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마을 중심에 있던 이 선술집은 주민들이 즐겨 찾는 모임 장소이자 음악회, 무용극, 연극 등이 열리는 예술 무대였다. 드보르자크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며 자랐다. 바이올린을 배운 이후부턴 ‘치터(손가락으로 현을 뜯어서 소리를 내는 민속악기)’를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아버지와 종종 이 무대에서 합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1884년 로브코비츠 가문이 매입한 드보르자크 생가는 현재 다양한 시청각 경험을 제공하는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여관, 선술집을 재현한 공간에서 오디오 기기를 통해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영상을 결합한 전시를 보며 어린 드보르자크의 삶을 그려볼 수도 있다.
넬라호제베스에서의 기억이 그에게 평생 영향을 미쳤다는 건 철도와 관련된 일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철도광’이라 불릴 만큼 평생 기관차를 동경한 인물로 유명하다. 드보르자크가 열 살 무렵 이 마을에서 처음 건설된 기차역과 철도의 움직임에 매료된 것이 그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이 마을에선 어린 드보르자크가 노래를 부르고 바이올린을 켰다고 알려진 작은 교회도 찾아볼 수 있다.
어린 말러가 '생애 최초의 피아노 연주회'를 연 탄광도시 이흘라바
‘교향악의 거장’ 구스타프 말러가 음악에 대한 재능을 처음 발견하고 키운 본고장은 체코의 서부 보헤미아와 동부 모라비아의 경계에 자리한 탄광도시 이흘라바였다. 그는 1860년 인근 마을 칼리슈테에서 태어났지만, 말러가 한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가족 모두가 이사했고, 1875년까지 줄곧 이흘라바에 머물렀다. 그의 실질적 고향이라 불리는 이유다. 19세기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즈넉한 중앙 광장에서 큰길을 따라 3분만 걸어가면 말러의 옆모습이 새겨진 석판이 그의 본가에 도착했단 걸 알려준다. 이 건물엔 말러가 신생아 시절 사용하던 유모차, 5살 때 찍은 사진부터 가족과 함께 쓰던 악기, 가구, 장신구, 식기 등이 전시돼 있다.
어린 말러에게 집은 안락한 장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이었던 아버지 탓에 집안에선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말러는 많은 시간 집 밖을 배회해야 했다. 말러에게도 불행했던 환경은 오히려 창작의 기폭제가 됐다. 당시 이흘라바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체코로 이동하기 위해 꼭 지나쳐야 하는 주요 거점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둔지로 사용됐다. 그 영향으로 각지의 군악대들은 매일 말러의 집 바로 옆에 있는 거대한 광장을 활보하며 장대한 선율을 뿜어냈다. 말러는 자연스럽게 오케스트라에서 주로 쓰는 금관악기와 타악기의 음향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다. 그만의 독보적인 작품 세계, 화성과 관현악법 혁신의 발판이 이때 형성된 셈이다.
말러의 아버지가 집 근처에서 운영하던 술집도 그에겐 매일 새로운 음악을 경험하는 보고(寶庫)와도 같았다. 말러가 일곱 살 때 술집에서 사람들이 모여 부르던 노래를 듣고 영감을 받아 동요를 작곡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이흘라바는 말러의 역량을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처음으로 그를 음악가로 인정한 도시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그는 열 살이 되던 해인 1870년 이흘라바 시립 극장에서 생애 최초의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는데, 당시 지역 언론들이 말러의 미래가 기대된다는 극찬을 쏟아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마을에선 말러가 9살 때부터 17살 때까지 음악 교육을 받았던 학교(현재 시립 도서관으로 운영), 그가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며 합창, 종교 음악의 이론적 틀을 정립한 성 야곱 교회, 그가 부모와 함께 찾은 유대교 회당 자리에 조성된 말러 공원 등도 발견할 수 있다.
야나체크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지킨 ‘평생의 안식처’ 브르노
‘체코 제2의 도시’ 브르노는 작곡가 야나체크의 도시로 불린다. 스메타나, 드보르자크와 함께 체코 3대 작곡가로 꼽히는 야나체크는 폴란드 국경 근처의 작은 마을 후크발디에서 태어났지만, 열한 살이 되던 해인 1865년 체코 모라비아의 중심지인 브르노로 이사한 뒤 생애 대부분을 이 도시에서 보냈다. 브르노 천문시계에서 북쪽으로 1km 정도 들어가 보면 들풀과 장미꽃이 여기저기 피어난 정원 사이로 살구색의 소박한 집 한 채를 찾아볼 수 있다. 야나체크가 1910년부터 세상을 떠난 해인 1928년까지 18년간 살았던 장소다.
10대 때부터 천재로 주목받는 여느 작곡가들과 달리 야나체크는 50대에 접어들고서야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작곡가다. 그의 전성기이자 노년기를 보낸 이 자택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다. 실제로 ‘타라스 불바’ ‘신포니에타’ ‘글라골리트 미사’ 같은 불멸의 명작은 야나체크가 이 자택에서 얻은 영감으로 써낸 결과물이다.
건물엔 그의 서재 겸 연습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야나체크가 생전에 사용한 피아노, 작곡할 때 쓴 필기구, 지휘봉 등이 전시되어 있다. 브르노에선 그의 흔적을 어디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야나체크가 후학 양성을 위해 직접 설립한 뒤 약 40년간 교장을 맡아온 브르노 오르간 학교, 그의 출세작 ‘예누파’가 세계 초연된 브르노 국립극장, 그의 이름을 딴 오페라, 발레 전문 공연장인 야나체크 극장 등이 대표적이다.
넬라호제베스·이흘라바·브르노=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