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청라에서 만난 클래식 공연의 성지

입력 2025-07-22 15:26
수정 2025-07-22 15:51
오늘도 행복하게 덕질을 하는 클덕들에게 ‘연주를 듣기 위해 어디까지 가봤니?’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전국 각지는 물론 세계 각국의 여러 도시들이 줄줄 나올 것이다. 나 역시 클덕이 된 이후 좋아하는 연주자의 공연을 보러 기차를 타고 낯선 지역에 처음 가보기도 하고 십 수 년 만에 다시 ‘그 나라’를 방문하기도 했으니, 과연 사람은 좋아하는 일 앞에서 용감해지고 추진력이 생기는 모양이다.

오늘 ‘작은 공연장’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지난 해 봄 취리히에서 열린 ‘게자 안다 콩쿠르’에서의 에피소드를 살짝 꺼내볼까 한다.



피아노 연주를 즐겨 듣는 나에게 국제 콩쿠르를 현장에서 직관하는 것은 로망 가운데 하나였는데, 지난 해 열린 ‘게자 안다 콩쿠르’는 여러 모로 좋은 기회였다. 아주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본선에 진출한데다 여행하기 좋은 시즌이었고, 스위스의 다른 지역은 가봤지만 취리히는 안 가봤다는 명분까지 더해져 어느 순간 나는 비행기표를 끊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방문한 스위스의 정취를 즐길 새도 없이 도착하자마자 첫 사흘 간 열린 1라운드에서 36명의 연주를 들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젊은 연주자들의 경연을 객석에서 보는 것은 잊지 못할 색다른 경험이었다. 콩쿠르라는 무대가 주는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면서도 음악에 대한 연주자들의 순수한 열정과 패기가 느껴져 뭉클하고 때로는 짜릿했다. 국적도 배경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오직 ‘음악’으로 소통하는 것을 보며 음악이란 정말이지 ‘국경이 없는 언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1라운드가 모두 끝나고 연주가 없는 일요일, 나는 그제야 관광객 모드로 취리히 미술관을 찾아 여유를 누렸다. 좋은 작품이 아주 많았던 그곳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을 감상하다가 어느 전시실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낯익은 한국인을 발견했다. 1라운드에 출전한 연주자 L이었다. 36명의 연주를 들으며 ‘다시 듣고 싶은 연주자’를 표시해 두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기도 했기에,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무작정 인사를 건네고 "연주 정말 잘 들었다. 한국에서 공연하면 꼭 보러 가겠다"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열흘에 걸쳐 파이널 라운드까지 모든 연주를 다 직관한 나의 ‘취리히 여행’은 잘 끝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바쁜 날들을 보냈다. 그러던 지난 겨울, 연주자 L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공연 소식이 올라와 무척 반가웠는데 장소가 인천 청라에 위치한 ‘엘림아트센터 엘림홀’이었다. 생소한 이름인데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꽤 먼 곳이라 조금은 고민이 됐지만 연주자를 믿고 티켓을 예매했다.

사실 서울에 사는 뚜벅이에게 청라국제도시까지 가는 것은 ‘짧은 여행’이다. 공항철도를 타고 가야 하다 보니 주변엔 온통 캐리어를 끌고 가는 여행객들이라 열차 안의 분위기는 설렘이 가득했다. 새로운 공연장을 찾아가는 나도 그 분위기에 숟가락을 얹어 마치 나만의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청라국제도시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더 가면 조용하고 잘 정리된 신도시 아파트 숲이 나타난다. 청라호수공원을 마주한 대로변에 카페와 음식점, 학원, 병원 등이 입점한 상업용 빌딩이 있고, 그 건물 6층과 7층에 엘림아트센터가 있다. 어디선가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나는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올라갈 때까지도 ‘이 건물에 공연장이 있다고?’라는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하지만 티켓을 받고 홀에 들어서는 순간 입.틀.막. 지금껏 내가 가본 작은 공연장 중에 가장 놀라웠던 곳은 바로 이곳 엘림홀이다. 300석 규모로 아주 작은 공간은 아니지만 천장이 유독 높아서 ‘체감 규모‘는 그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실제로 이곳은 천장 높이가 약 12m로 보통 공연장보다 5m 정도 더 높다고 한다) 무대에는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돼 있고, 자작나무로 마감한 벽과 바닥이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에서 다시 만난 연주자 L의 연주를 들으며 빼어난 어쿠스틱 사운드에 또 한 번 놀랐다. 음량이 아주 풍성하면서도 악기 본연의 소리가 홀 안에 고르게 가득 차, 연주자의 노래가 어떤 왜곡이나 과장 없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슈만과 라흐마니노프로 무대를 채운 L의 연주는 편안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쳤고 깨끗한 음색이 돋보였다. 콩쿠르 무대에서와는 달리 자유롭게 훨훨 나는 듯한 연주는 생기가 가득해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연주가 끝난 뒤 로비에서 연주자 L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덕분에 좋은 공연장에서 좋은 연주를 다시 듣게 되어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언젠가 이곳에서 오르간 연주도 꼭 한 번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바로 얼마 전 그 기회가 찾아와 두 번째 ‘청라행 음악 여행’을 떠났으니 6월의 네 번째 일요일, 독일 데트몰트 국립음대 교수인 오르가니스트 마티아스 노이만의 독주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우연히 발길이 닿은 여행지가 너무 좋아서 잊지 못하고 다시 떠나는 기분으로 ‘엘림홀’을 향해 가는 길, 공항철도에는 여전히 여행객들의 설렘이 가득했고 처음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온통 푸르름이 가득한 계절이라 시선이 닿는 곳마다 더욱 아름다웠다. 엘림아트센터 로비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공원의 여름 풍경도 시원했다.



2,480개의 파이프를 연결한 엘림홀의 파이프오르간은 독일 Gerald Woehl사-바흐가 활동했던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파이프오르간을 개보수한 업체-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날 마티아스 노이만은 쉬지 않고 1시간 넘게 쭉 연주했는데 오르간에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그 음색이 정말 맑고 따뜻했다. 무파트와 뮈텔, 바흐, 모차르트와 슈만, 레거까지 오르간을 위해 쓰인 곡들을 한 자리에서 들으며 가까이에서 연주자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지만 성스럽고 신비로운 오르간의 울림에는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하는 특별한 매력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먼 길을 오고 가는 수고로움은 ‘좋은 음악’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었던 시간, 취리히에서 우연히 ‘반짝이는 연주자’를 만나고 그 연주자로 인해 또 ‘숨은 보석 같은 공연장’을 만나게 되었으니 먼 나라에서 시작된 작은 인연이 특별한 선물을 준 것 같았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 크고 작은 클래식 공연이 정말 많은 때이기도 하다. 더위도 식히고 마음까지 청량해질 수 있는 당신 근처의 작은 공연장으로 ‘음악 여행’을 떠나보기를 권한다. 그 길에서 만날 어떤 인연과 음악이 주는 기쁨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시원할지도 모른다.

아, 엘림홀에서는 매주 일요일 오후, 영 아티스트의 무대를 비롯해 다양한 기획 공연이 열린다. 티켓 가격은 단 1만원. 청라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권혜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