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대만해협에서 새 비행 항로 개통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대만이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반대해온 항로다. 친미·독립 성향의 집권 민주진보당을 압박하는 성격으로, 일각에선 중국이 ‘회색지대 전술’을 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무력 충돌과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을 정도로만 도발해 안보 목표를 이루는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中, 대만해협 주변 새 항로 개통7일 중국과 대만 매체에 따르면 전날 중국 민용항공국(CAAC)은 대만해협을 남북으로 연결한 M503 노선의 북쪽 가로 노선인 W121 항로 운항을 시작했다. 대만해협은 중국 남동부 푸젠성과 대만 사이를 가르는 길이 400㎞, 너비 150~200㎞의 좁은 바다다. 이 사이에 대만과 중국의 실질적 경계선인 중간선이 있다. 중간선은 1940년대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거점을 옮긴 뒤 양안(중국·대만) 충돌을 막기 위해 미국이 그은 비공식 경계선이다. 한국 및 북한의 서해와 동해 해상 경계선인 북방한계선(NLL)과 비슷하다.
M503 항로는 이 중간선에서 중국 쪽으로 약 7.8㎞ 떨어져 있다. 이 항로에서 중국 본토 둥산·푸저우·샤먼을 가로로 연결한 것이 W121, W122, W123 항로다.
중국은 2015년 일방적으로 이들 항로 개통을 선언했지만 대만은 민간 항공편 안전을 이유로 강력 반발했다. 이후 중국과 대만은 협상 끝에 M503 항로에서 중국 쪽으로 6해리(약 11㎞) 떨어진 절충 항로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W121·W122·W123 항로는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지난해 친미·독립 성향이 강한 라이칭더 대만 총통이 취임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중국은 작년 2월 절충 항로 대신 M503 항로를 쓰겠다고 나섰다. W122와 W123 항로 사용도 선언했다. 그러더니 이번에 나머지 W121 항로마저 쓰겠다고 밝힌 것이다.
군사 전문가들은 중국이 M503 항로와 W121, W122, W123 항로를 모두 본격적으로 사용하면 대만의 안보 위협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대만 국방부 싱크탱크 국방안보연구원은 M503 항로에 비상 상황이 발생해 대만으로 향한다면 타이베이 비행정보구역에 30초 안에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이번 결정을 두고 민진당은 “현재로선 군사 영향이 미미하지만 중국이 단계적으로 수위를 높여갈 것”이라며 “대만해협의 중간선 개념을 약화하려는 의도”라고 반발했다.
일각에선 중국의 회색지대 전술 일환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오는 9일부터 이뤄지는 대만의 연례 합동군사훈련에 중국 회색지대 전술 대비 훈련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자 중국이 선제적으로 압박에 나섰다는 분석도 있다.
중국은 일상적인 민항 공역 관리의 연장이라는 입장이다. 중국의 대만 담당 기구인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은 “M503 및 W122·W123 항로 개통 이후 전반적으로 운항이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개선됐다”고 밝혔다. ◇정교해지는 중국의 ‘저강도 도발’전문가들은 중국의 회색지대 전술이 갈수록 정교화하면서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영토 분쟁을 하고 있는 남중국해에 인공 섬을 조성하고 단계적으로 미사일 등을 배치하는 게 대표적이다. 서해 잠정조치수역(PMZ)에 최신 항공모함인 푸젠함을 투입해 군사훈련을 벌인 것도 마찬가지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이미 중국군 전투기는 대만해협 중간선을 월 120회가량 침범하면서 사실상 경계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다. 중국은 지상군 전력도 빠르게 강화하고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외부 드론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전문 전투 부대 창설을 추진하고 있다.
베이징 외교가 관계자는 “일상적 훈련과 공격적 행위의 경계를 분명하게 나눌 수 없는 군사 움직임이 반복되면 경계 태세가 느슨해질 것이라는 점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미·중 갈등이 휴전을 지나 다시 격화한다면 양안 분쟁이 새로운 카드로 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김은정 특파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