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노조의 파업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고 하청 노동자에게도 원청과의 단체교섭권을 부여하는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이 연내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산업계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정치권은 속도조절에 나선 모습이지만 해당 법안이 이재명 대통령이 야당 시절부터 추진해온 노동계 핵심 과제라는 점에서 재계는 통과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최근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로 민주노총 출신 김영훈 전 위원장이 지명되면서 이 같은 전망이 더욱 힘을 얻고 있다. 김 후보자는 “노란봉투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고 공언했다.
고금리·고물가·글로벌 불확실성 속에서 기업들은 파업 리스크 상시화, 채용 축소, 투자 유보, 공장 해외 이전 등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재계는 노란봉투법이 “한국 기업의 경쟁력을 뿌리째 흔들 수 있는 규제”라며 반발하고 있다.
손배 제한·원청 교섭 의무…“기업에 구조적 부담”
노란봉투법은 파업의 위법성 여부와 관계없이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를 제한하고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 기업에 직접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한다.노동권 강화 측면에서는 의미 있는 진전이지만 기업 입장에선 파업 대응 수단 약화와 현장 관리 어려움, 법적 책임 증가 등이 새로운 리스크로 부각되고 있다.
재계는 불법 파업에 대해서도 손해배상 청구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대응력 약화를 우려한다. 특히 원청 사용자 책임이 확대되면 수십, 수백 개 협력업체의 노조 요구를 모두 감당해야 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크다. 사용자 개념의 확장에 따른 법적 분쟁도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권은 경영계 우려를 반영해 원안을 일부 수정한 형태의 법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산업계는 여전히 산업 생태계 붕괴와 파업 증가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사용자 범위를 둘러싼 해석의 여지가 커 법적 불확실성이 크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실제 일부 중소기업은 이미 선제 대응에 나섰다. 한 자동차 부품업체 관계자는 “노조 교섭권 확대와 손해배상 소송 제한은 고용을 리스크로 만든다”며 내년도 채용 계획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밝혔다. 이 업체는 정규직 채용 대신 자동화 설비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전환 중이다.
노란봉투법이 통과되면 기업 경쟁력 약화, 투자 위축, 고용 감소 등 전방위 부작용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노란봉투법’(28.2%)은 ‘근로시간 단축’(31.1%)에 이어 기업 경쟁력에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규제로 지목됐다.
지난 4월 강원대 비교법학연구소와 학술 단체인 미래노동법혁신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토론회에서는 “법안 시행 시 연간 5000억원 이상의 손실과 약 4000억원에 달하는 외국인 투자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됐다.
특히 노란봉투법의 모호한 사용자(원청) 개념으로 현대차처럼 5000여 협력사를 둔 대기업은 1년 내내 원·하청 교섭에 시달릴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원·하청 사용자성 소송 등 법적 분쟁으로 사회적 비용 증가도 문제로 지적된다.
하청 구조 복잡한 중후장대엔 더 치명적
하청 구조가 복잡한 조선, 철강, 건설, 자동차 등 중후장대 업종은 노란봉투법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업종은 한 공정의 중단이 전 생산 라인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교섭 범위 확대는 막대한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대우조선해양 시절인 2022년 하청노조의 51일간 불법 점거로 약 8100억원의 피해를 입은 한화오션은 최근 노조와의 상호 고소·고발 취하를 합의했다. 470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도 취하를 준비 중이다. 업계는 이를 노란봉투법 통과에 대비한 선제적 조치로 해석하고 있다.
철강업계 역시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철강은 조선, 자동차, 건설 등 전방 산업에 필수 소재를 공급하는 만큼 노조 파업이 산업 전반에 연쇄 영향을 줄 수 있다. 건설업계도 하청 노조 파업 시 공기 지연과 추가 비용 부담이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대응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자동차 업계도 예외는 아니다. 원청이 협력사 직원들과의 단체교섭 책임을 부담하게 되면 기존 단체협약 체계 전면 조정이 불가피하다. 실제 현대제철은 올해 성과급 문제로 파업이 발생하자 창사 이래 처음으로 부분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냉연라인 가동이 중단되며 약 254억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해외 투자는 더욱 확대되고 있다. 현대제철은 미국 루이지애나에 약 8조5000억원 규모의 제철소 건설을 추진 중이며 포스코 역시 인도와 미국 등에서 신규 제철소 프로젝트에 속도를 내고 있다. 기업들은 국내의 파업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동남아, 중동, 동유럽 등으로 생산기지를 다변화하고 있다.
외국계 기업도 예의 주시…경영계, 속도조절 요청
외국계 기업들도 노란봉투법에 따른 경영 환경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글로벌 제조, 물류, IT 기업들은 노동 유연성과 예측 가능성을 핵심 투자 기준으로 삼는 만큼 노사 규제 강화는 본사 투자 심사에서 ‘리스크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 유럽계 전자부품 제조업체 관계자는 “법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본사에서는 한국 시장에 대한 투자 확대에 제동을 걸 가능성이 크다”며 “이미 일부 생산라인은 동남아로 이전했다”고 전했다. 이는 국내 고부가가치 설비 투자, R&D센터 신설 등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경제계는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경제인협회 등 6대 경제단체를 중심으로 정치권에 입법 속도조절을 요청하고 있다. 지난 6월 25일에는 경제6단체 상근부회장단이 여야 원내대표를 만나 “경제 관련 법안은 현장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며 우려를 전달했다.
정부 역시 상법 개정안과 달리 노란봉투법은 야당과의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경영계는 현재 논의 중인 수정안으로는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전문가들은 노동권 보호와 산업 경쟁력 사이에서 균형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노란봉투법을 단순히 ‘반기업·친노조’ 법안으로 보는 것은 과장”이라며 “이 법은 노동3권과 사유재산권 간 균형을 위한 입법적 절충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과도한 손해배상 가압류와 원청의 책임 회피 관행을 제한하려는 취지이지만 실질적인 변화는 사법부 해석과 노사 양측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기업은 과거 파행적인 노사관계 관행에서 벗어나야 하며 노동조합 역시 보다 포괄적이고 대표성 있는 체계로 변화해야 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