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업체의 절반이 3년 안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은 한때 최대 시장이던 중국이 직접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해 저가로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원유 공급처인 중동 국가들도 조만간 ‘정제·가공 후 판매’에 본격 뛰어들 채비를 갖추고 있다. 구조조정이 시급하지만 업체들은 ‘내 설비를 먼저 감축하겠다’는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공정거래위원회의 독과점·기업결합 규제 때문이다. 김기식 국회미래연구원장은 “이대로 흘러가다간 큰 대가를 치르고 망가진 해운산업처럼 될 수 있다”며 정부 차원의 결단을 요구했다.
◇ “담합 우려로 구조조정 논의조차 못해”2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석유화학 구조조정 포럼에 참석한 기업들은 사업 재편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공정거래법상 담합 우려를 꼽았다. 현행 담합 금지 조항 때문에 ‘업체 간 대화’를 나누는 것도 조심스럽다는 것이다. 엄찬왕 한국화학산업협회 부회장은 “기업들이 설비를 통폐합하고 생산량을 감축하려면 정보를 교환해야 하고, 가격도 논의해야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이 담합으로 해석될 여지가 여전히 크다”며 “산업통상자원부와 공정위가 합의해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정거래법상 시장점유율 합계가 업계 1위가 되는 경우에는 기업 결합이 사실상 금지되기 때문에 인수합병(M&A)에 나서기도 힘들다. 대기업이 주도하는 ‘석유화학 빅딜’이 어려운 대표적 이유다. 김민우 롯데케미칼 전략기획본부장은 “기업들은 국내를 넘어서 해외 시장에서 경쟁한다”며 “국내 기업 시장 점유율을 기준으로 독과점을 판단할 게 아니라 ‘유연한 검토’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금 감면과 금융 지원도 구조조정을 위한 필수 요소라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엄 부회장은 “사업 재편을 위해 설비를 양도하거나 폐기하면 각종 세금이 발생하는데 이에 대한 정부 지원이 요긴하다”고 말했다. 대기업은 사업 재편 시 정부 지원 대상에서 빠져 있는 기업활력제고법도 구조조정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석유화학기업 대부분은 장치산업을 영위하는 대기업이기 때문이다. 전기요금 인하 등으로 원가경쟁력을 지켜줘야 구조조정을 할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주문도 나왔다. ◇ ‘소수 정예’로 합치고 수직통합포럼에 참석한 업계 관계자들은 정제된 원유에서 기초유분을 만드는 업스트림 공정 생산량은 줄이고, 가공제품을 생산하는 다운스트림 공정은 ‘고부가가치 위주’로 재편해야 한다는 데 대체로 공감대를 이뤘다. 김 본부장은 “60~70%의 낮은 가동률로 따로 운영되는 공장들을 통합해 효율적인 ‘소수 정예’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며 “수익성이 높은 제품을 집중 생산하면 중국의 저가 범용제품 공세에도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훈 보스턴컨설팅 대표파트너는 “울산·대산·여수 등 산업단지에 따라 상황이 달라 각각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며 “외국계 기초유분 공장이 몰려 있는 여수는 특히 구조 개편이 어려워 특단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나프타에서 기초유분을 뽑는 나프타분해설비(NCC) 대신 셰일가스 기반 에탄을 활용한 에탄크래커(ECC)를 활용할 수 있도록 에탄 수입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유사와의 통합도 대안으로 거론됐다. 업계에선 석유화학회사가 정유사와 시설을 합치면 운송비 절감 등으로 생산비용이 5%가량 줄어들 것으로 본다. 김상민 LG화학 석유화학본부장은 “수평적 통합은 단순히 몸집만 큰 ‘공룡 기업’의 출현에 그칠 수 있다”며 “근본적인 원재료비 절감을 위해선 정유사와의 수직적 통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당장 국내 석유화학산업 재편에 나서더라도 2~3년이 소요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기간에 기업의 유동성 위험과 금융비용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안시욱/김대훈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