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유명 현대 미술관인 휘트니미술관에서 10분 정도 남쪽으로 걸어 내려가면 왼쪽에 11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외관은 허름하지만 입구엔 경비원이 지키고 서 있다. 최근 기자가 휴대폰으로 건물을 찍자 곧바로 “사진을 촬영하면 안 된다. 당장 떠나라”는 고함이 돌아왔다. 이 건물엔 유명 사진작가 애니 리버비츠가 얼마 전 1650만달러에 구매한 펜트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서 도보로 5분가량 떨어진 찰스스트리트의 한 콘도(공동주택)는 최근 맨해튼 다운타운 일대에서 역대 최고가인 6000만달러에 거래돼 화제를 모았다.
◇고가 주택 거래 많아30일 뉴욕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맨해튼에서 14번가 남쪽 다운타운 지역이 고급 주거지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과거엔 센트럴파크 주변의 어퍼이스트사이드와 맨해튼 57번가를 중심으로 한 빌리어네어스 로가 뉴욕의 대표적인 고급 주거지였다. 하지만 요즘엔 다운타운 웨스트빌리지 일대가 뉴욕의 신흥 부촌으로 떠오르고 있다.
웨스트빌리지 일대에선 고가 주택 거래도 늘고 있다. 부동산 분양·마케팅 회사 코코란선샤인은 2023년 이후 맨해튼 다운타운에서 2000만달러 이상 고가 주택 거래액이 총 10억달러를 넘었다고 밝혔다.
건수를 공개하진 않았지만 거래가 늘어난 건 분명하다는 게 부동산업계 전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지난 5년간 웨스트빌리지 등 34번가 남쪽 다운타운에서 3000만달러 이상 고가 주택 판매 건수가 이전 10년보다 많았다고 보도했다.
이 일대에 부자가 몰리면서 거래량이 늘어난 것이다. 코코란선샤인은 “웨스트빌리지 제인스트리트에 있는 한 콘도는 지난해 8월 분양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총 12채가 팔렸는데 이 중 3채는 각각 4000만달러 이상에 계약됐다”고 했다. 또 “콘도 내 한 펜트하우스는 8750만달러에 매물이 나와 있다”고 덧붙였다.
부자 사이에서 웨스트빌리지 인근 첼시, 트라이베카 지역도 인기다. WSJ는 올해 2월 트라이베카에 있는 한 펜트하우스가 4140만달러에 팔렸고, 지난해 웨스트첼시 원하이라인에 있는 집은 4900만달러에 계약이 체결됐다고 전했다. ◇금융·문화 중심웨스트빌리지를 중심으로 한 맨해튼 다운타운 지역이 신흥 부촌으로 뜬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금융·테크 기업이 인근으로 옮겨왔다. 구글과 사모펀드 KKR 등이 허드슨야드와 웨스트빌리지 인근에 사무실을 열었다. 이에 따라 직장과 거주지 거리를 최소화하려는 고소득층의 수요가 몰리고 있다.
웨스트빌리지는 월가와도 비교적 가깝다. 찰스스트리트에 있는 집 한 채를 6000만달러에 산 매입자는 월가 퀀트 트레이딩 회사인 ‘제인스트리트캐피털’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퍼이스트의 고급 아파트보다 사생활 보호가 잘되는 것도 장점이다. 웨스트빌리지 콘도 상당수는 가구별 출입구가 따로 있다. 콘도 현관에서 서로 마주칠 일이 거의 없다. 어퍼이스트 고급 아파트가 입주자의 직업, 학력, 금융 상태를 엄격히 심사하고 임대 제한 규정까지 두는 것과 달리 웨스트빌리지 콘도는 입주자 심사가 상대적으로 덜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신흥 부자의 라이프스타일과 맞아떨어진다는 평가도 나온다.
웨스트빌리지 일대 일부 지역은 허드슨강을 내려다볼 수 있어 센트럴파크와 비교해도 ‘경관뷰’가 손색없다. 웨스트빌리지엔 콘도뿐 아니라 상당히 면적이 넓은 타운하우스도 적지 않다. 부동산 중개회사 관계자는 “산책로인 하이라인과 휘트니미술관을 비롯한 첼시 인근의 유명 갤러리, 파인다이닝 등이 웨스트빌리지에 집중된 것도 부자의 흥미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