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필, 11년 만의 내한… 거장 지메르만과 빚어낸 '절제의 미학'

입력 2025-06-29 10:16
수정 2025-06-30 17:20

국내에서 뉴욕필하모닉의 연주를 듣는 건 희소한 경험이다. 베를린필, 빈필은 상대적으로 자주 내한하지만 뉴욕필은 무려 11년이라는 공백이 있었다. 완벽주의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협연자로 나섰다. 지메르만은 조국 폴란드에 대한 미국의 군사조치에 항의해 2009년 이후 미국 공연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뉴욕필과 함께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섰다. 뉴욕필과 오랜 인연을 이어온 에사페카 살로넨이 지휘자로 함께 내한했다.

2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공연의 프로그램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과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공연 시작 전, 휴대전화 녹음·녹화·사진촬영에 대한 강한 경고가 있었다. 향후 내한공연 추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니 삼가달라는 당부였다. 전 세계 어딜 가든 자신의 피아노를 운반해 연주하고, 공연 중 휴대전화 소음이나 녹음 행위에 단호하며 앙코르는 하지 않는 아티스트. 그의 고집과 신념은 잘 알려져 있다. 이날 1부는 단연 지메르만에 관심이 집중됐다.

지메르만은 찰랑이는 실크 소재의 검정 연미복을 입고 백발을 휘날리며 등장했다. 늘 지참하는 긴 악보도 함께였다. 여러 장의 악보를 가로로 길게 붙여 피아노 위에 가지런히 놓는 순간, 무대는 독특한 시공간으로 변모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피아노로 시작하는 독특한 이 협주곡에서 지메르만은 살짝만 건반을 터치하는 듯한 타건으로 맑은 소리를 냈다. 건반을 터치한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가벼운 터치였다. 볼륨이 피아노시모인데도 정확하게 객석에 꽂혀 전달됐다. 지메르만의 과거 요구대로 무대 위 마이크도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지메르만 앞에서 청중이 유독 조용했기 때문일까. 그의 소리는 2500여 석의 콘서트홀 구석구석에 도달했다.

실제로 본 그의 협연 모습은 파격적이었다. 아예 단원들을 향해 몸을 돌려 앉고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딱이며 음악을 느꼈다. 지휘자처럼 한 손을 휘젔거나 곡 중간에 피아노 의자 높이를 조절하는 여유도 보였다.

그의 연주는 그동안 들었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과 달랐다. 특히 1악장의 카덴차에서 그는 악보를 뛰어넘어 그만의 자유로운 템포로 해석했다. 박자를 밀고 당기는 여유는 마치 재즈적인 해석처럼 들렸다.

지메르만의 여유 있는 밀당에 뉴욕필과 살로넨은 전혀 당황하지 말고 합을 맞췄다. 살로넨의 지휘 스타일이 마치 스포츠카처럼 파워풀하고 유려하다는 평이 와닿는 연주였다. 핀란드 출신 지휘자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스타일도 협연자와 잘 어울렸다.

중간에 피아노 연주가 멈춘듯한 공백이 있었지만 그 역시 볼륨과 박자 조절의 일부였다. 소리가 폭발할 때보다, 속삭이듯 낮고 조용하게 연주할 때 객석은 더 숨죽였다. ‘페이드 인’과 ‘페이드 아웃’의 지점을 살로넨과 뉴욕필은 잘 포착했다.



2악장은 오케스트라가 묵직한 저음으로 중심을 잡고, 경건한 피아노 소리가 어우러져 풍성한 색채를 만들었다. 반복되는 멜로디의 3악장은 “좋은 음악은 결국 대화”라는 걸 보여줬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가 서로 음악을 듣고 호흡을 맞추는 것. 따뜻한 눈빛과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 펼쳐졌다. 마지막 몰아치는 클라이맥스는 지메르만이 앞서 보여준 차분함과 대비되어 더 돋보였다. 그는 절정 구간에서도 과하지 않게, 절제된 방식으로 연주했다. 때로는 객석과 유리된 듯한 차가운 느낌도 받았지만 분명한 건 지메르만의 색채가 확실한 연주였다.

앙코르는 없었다. 세 차례 커튼콜로 객석의 환호에 화답했다. 단원들에게 손키스를 날리고 살로넨에겐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퇴장 직전, 그는 피아노 뚜껑을 닫고 긴 악보를 들고 살로넨과 어깨동무한 채 쿨하게 퇴장했다.

2부는 뉴욕필의 음색을 온전히 즐기는 시간이었다. 1842년 창단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와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악단. 이들이 택한 곡은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이었다. 이 곡은 프랑스혁명, 자유, 인권에서 베토벤이 받은 영감의 산물. 마지막 피날레의 변주는 당시 유럽 사교계에서 인기 있던 춤곡을 담고 있다. 뉴욕필이 매년 꼭 연주하는 레퍼토리로, 살로넨의 유연하면서도 강렬한 지휘가 돋보였다. 악단은 최소한의 몸짓으로 세련된 소리를 뽑아냈고, 여유 있는 연주를 들려줬다.

2악장은 웅장하지만 과하지 않은 숭고미가, 3악장은 몰아치듯 사운드를 빌드업하고 터뜨리는 살로넨의 역량이 돋보였다. 바흐의 소품곡과 베토벤의 발레 음악 중 피날레 등 2곡의 앙코르곡을 들려줬다.


뉴욕필의 매력은 다양한 개성을 품으면서도 그것을 조화롭게 이끌어내는 감각 아닐까. 단원들의 인종적 다양성과 자유로운 분위기는 ‘이민자의 도시’ 뉴욕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이날 프로그램은 다소 평이했지만 혁신적인 음악을 선보여온 뉴욕필의 새 공연에 대한 기대감도 함께 높아졌다. 특히 내년 9월 취임하는 구스타보 두다멜과의 만남이, 이 ‘멜팅팟’ 같은 오케스트라에 어떤 색을 입힐지 관심이 쏠린다.

한편, 이날 공연은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과 배우 박보검 등 유명인들이 공연장을 찾아 눈길을 끌었다. 다음날(28일) 뉴욕필의 협연 없는 공연에서는 지메르만이 직접 객석에 앉아 공연을 관람하고, 공연장 주변을 누비고 다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