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길 옆 담벼락에 큰 나팔꽃 같은 능소화가 한창이다. 우아하게 벌어진 주황빛 꽃무리는 무심히 걷는 이의 발걸음마저 붙든다. ‘능가할 능(凌), 하늘 소(?).’ 하늘을 거스를 기세로 피어오른다는 그 이름에 담긴 기개처럼 능소화는 예부터 ‘양반꽃’으로 불렸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시험 장원 급제자의 머리에 꽂아주거나 벼슬아치 모자를 장식하는 필수품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능소화는 시들어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가장 찬란한 순간 꽃송이째 떨어진다. 스스로를 떨군 뒤에도 여전히 고운 낙화가 바닥을 수놓은 것을 보고 있으면 절정의 순간 명예를 지키려는 숭고한 정신에 능소화의 진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능소화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 안에서 서울지하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겹쳐 본다. 1974년 주요 일간지는 지하철의 등장을 ‘교통 혁명’이라고 칭하며 서울의 시간과 공간을 다시 쓰는 역사적 전환점으로 기록했다. 새로운 노선이 놓일 때마다 서울은 한 걸음 더 성장했고, 시민들은 더 촘촘히 연결됐다. 그러나 도시의 이목을 한껏 집중시킨 화려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하철이 시민 일상의 일부로 깊숙이 자리 잡아갈수록 낡고 무거운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하루평균 수백만 명의 발걸음을 지탱하는 사이 승강장과 선로, 전동차에는 세월이 그은 주름이 스몄다. 낡은 기계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고, 처음 설계된 시간의 한계는 단순 보수나 부분 교체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근본적 개선을 위해서는 대대적 교체가 필수적이지만 더딘 요금 인상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마련하는 일은 늘 어려움에 부딪혔다.
그렇다고 그냥 뒀다가는 안전 문제로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이 눈앞에 닥쳐 있다. 서울지하철의 딜레마는 미국 옐로스톤국립공원 버펄로의 겨우살이와 닮았다. 혹독한 겨울, 2m 높이의 눈이 쌓이면 먹이 활동이 어려워진다. 이들은 간헐천 주변으로 이동해 비소에 오염된 풀을 먹고 서서히 시들어 가거나, 깊은 산 속에 남아 지독한 굶주림 끝에 생을 마감하곤 한다. 생존을 모색하는 처절함이 배어 있는 삶의 딜레마인 것이다.
한여름 피어나는 능소화는 지고 나서도 또다시 피고 지고를 거듭한다. 음지에서도 꿋꿋이 생명을 이어가는 힘을 보여준다. 뜨거운 햇살 아래 굳건히 피어오르는 강인함,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는 고귀한 절개야말로 이 꽃이 진정으로 빛나는 이유다. 숱한 어려움에도 서울지하철은 능소화처럼 꺾이지 않고 다시 피어날 날을 묵묵히 준비하고 있다. 시민의 안전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각오를 다시 새긴다.
새벽녘 열차는 마을을 가로지르며 힘차게 달려간다. 동네 개들이 아무리 짖어도 묵묵히 어둠을 헤치며 앞을 향해 나아간다. 50년 서울지하철이 옐로스톤 버펄로의 삶과 같지 않도록 시민과 함께 희망을 두드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