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스페셜 리포트 - 밸류업 1년, 남은 과제는 ③
2025년 정기주주총회 시즌이 막을 내렸다. 과거 주총은 이사회가 상정한 안건을 통과시키는 형식적 절차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개인투자자 수 증가, 의결권 플랫폼 활성화 등으로 주총의 위상이 크게 변하고 있다. 특히 정부가 2024년에 발표한 ‘밸류업 프로그램(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계기로 자본시장 내 기업가치 제고와 지배구조 개선 요구가 본격화되며, 일반주주의 목소리도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올해 주총에서도 이러한 변화는 수치로 확인된다. 의결권 자문사인 한국ESG연구소(KRESG)에 따르면, 2025년 정기주총에서는 685개 상장사가 총 4678건의 안건을 상정했다. 이는 전년보다 150건 증가한 수치다.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주주제안의 급증이다. 2024년 전체 안건 중 주주제안은 1.1%(52건)에 불과했으나, 올해는 2.5%(117건)로 2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 정부가 발표한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프로그램’은 상장사의 자본 효율성 제고와 지배구조 개선을 목표로 한다. 이 정책은 지속가능한 기업가치 증진을 위해 경영전략, 자본 정책 등 전반에 걸쳐 주주와의 소통을 강화하며 구조적 개선을 유도한다. 이와 긴밀하게 맞물려 일반주주의 주주제안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밸류업 이행을 감시하고 촉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주주제안, 기업 거버넌스 개선의 실질적 수단
주주제안은 단순한 절차적 권리를 넘어 기업 거버넌스 개선의 실질적 수단이다. 일반주주는 이를 통해 경영진이나 지배주주의 독단을 견제하고, 기업경영의 책임을 요구할 수 있다. 이러한 감시 장치가 작동할 때 기업의 투명성과 경영 효율성은 물론, 장기적 기업가치도 함께 개선된다.
주주제안의 증가는 단순히 안건 수 증가를 넘어 자본시장에 긍정적 변화를 유도한다. 먼저 거버넌스 견제 기능을 강화한다. 주주제안은 소액주주가 경영진이나 지배주주의 전횡을 감시할 수 있는 실질적 수단이다. 이를 통해 이사·감사 선임, 보수한도 결정, 정관 개정 등 주요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 기업의 책임경영 측면에서도 기여하는 바가 있다. 주주제안이 많아질수록 기업은 주주 관점에서 경영 이슈를 선제적으로 점검하고 대응해야 한다. 이에 따라 경영전략에도 신중함이 요구되며 주주환원정책, ESG 경영, 자본 효율성 개선 등도 고려된다.
주주들의 적극적인 경영 참여는 기업에 대한 신뢰와 관심을 나타내는 신호다. 주주제안 수용률이 높은 기업일수록 거버넌스 점수가 높고,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완화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소통 문화 정착에도 기여한다. 과거에는 이사회가 일방적으로 안건을 상정하고 통과시키는 구조였다면, 주주제안이 늘어날수록 경영진도 주주와의 소통을 전략적으로 준비하게 된다. 이는 IR 활동 강화와 함께 주주 친화적 기업문화를 촉진한다.
주주제안으로 실질적 변화 나타나
올해 KRESG의 커버리지 중 시가총액 6000억 원 이상(2025년 3월 31일 종가 기준) 기업의 주주제안 유형을 보면 다음과 같다. DI동일은 2025년 정기주총에서 감사 선임 및 집중투표제 도입이 이뤄졌다. 주주제안을 통해 상근감사 후보를 선임하고, 정관에 집중투표제 규정을 도입함으로써 소액주주의 이사회 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었다. 제약사 오스코텍은 주주제안을 통해 비상근감사 선임뿐 아니라 집중투표제 도입 안건을 가결했다.
고려아연의 경우 단일 기업에서 가장 많은 주주제안(52건)을 받았고, 주주연대를 통한 연속성 있는 목소리로 3명의 이사가 실질적으로 선임되었다. 또 주주행동 플랫폼 액트는 영풍을 향해 ESG 경영 원칙의 수립 및 아연 제련 설비 강화를 촉구했고, 기업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마트의 경우 한 소액주주가 밸류업 관련 주주제안을 제출했다. 그 내용에는 분기별 밸류업 이행 공시 의무화 등이 포함되었다. 비록 해당 안건은 주주총회에서 부결되었으나, 이사회는 자발적으로 제안 내용을 수용하고 실제로 분기별 밸류업 이행 공시에 준하는 IR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DB하이텍은 밸류업 계획을 공시한 이후 집중투표제 도입과 자기주식 소각 등의 주주제안을 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하는 행보를 보였다(주총에서 주주제안 안건이 통과되지는 않음).
기업은 밸류업 공시를 통해 자본 효율성과 주주환원 전략, ESG 경영 계획 등을 외부에 명확히 밝힘으로써 경영에 대한 책임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게 된다. 동시에 일반주주는 이를 바탕으로 기업활동을 감시하고, 주주제안을 통해 직접적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종전의 일방적 거버넌스를 벗어나 기업과 주주가 함께 책임을 나누는 새로운 거버넌스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밸류업 계획이 단순한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 이행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주주제안을 비롯한 외부의 견제와 피드백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소액주주와 기관투자자, 주주행동 플랫폼의 참여가 늘어날수록 기업은 정기주총을 단순한 연례 행사가 아닌, 전략적 소통의 장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 같은 변화는 한국 상장사의 거버넌스 개선뿐 아니라 글로벌 투자자의 신뢰를 회복하는 핵심 경로가 될 것이다.
정기주총 쿼터제 도입 검토 필요
주주제안을 통한 감사 선임이나 집중투표제 도입이 지금보다 활발히 이루어지려면 이사회 및 경영진의 소극적·방어적 대응을 제재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예컨대 주주제안을 접수한 경우 수일 이내(예로 3영업일 이내)에 해당 제안의 주요 내용 및 이사회의 대응 방향을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시스템(DART)을 통해 공시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이 있다. 제안이 주총 안건으로 채택되지 않은 경우 이사회가 수용하지 않은 구체적 사유도 함께 공시될 수 있다.
주주제안 활성화를 위한 또 다른 과제는 정기주총 집중일 해소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2024년 12월 결산법인 2675개사 중 66.1%가 3월 중 단 3일에 주총을 집중 개최했다. 이러한 집중 현상은 주주제안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실질적으로 주주권 행사를 지원할 수 있도록 대만처럼 일정 기간 내 주총을 개최하는 기업 수에 상한을 두는 정기주총일 쿼터제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주주제안은 단순히 일부 소수주주의 요구를 넘어 기업 거버넌스 개선과 장기적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향후 주주제안이 실효성 있게 작동하려면 제도적 장벽을 낮추고, 정보의 투명성과 접근성을 높이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흐름이 정착될 때 궁극적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안효섭 한국ESG연구소 거버넌스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