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기술 패권 경쟁에서는 1등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다섯 개 미래산업에서 한국이 1등이 돼야 하고, 이를 위해선 투자금의 절반을 국가가 부담해야 합니다.”
김진표 전 국회의장은 10일 “지금 한국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미래산업의 주도권을 쥐는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김 전 의장은 이날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상에 없는 첨단 과학기술을 개발하려면 수천조원 자금이 필요하지만 성공 확률은 50% 정도”라며 “이런 리스크를 모두 떠안을 민간 기업은 없기 때문에 미국 중국 일본 등 패권 경쟁을 벌이는 나라들은 정부가 투자금의 절반가량을 보조해 준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구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부총리급 인구전략기획부를 설립하는 것도 새 정부의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김 전 의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인수위원장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을 맡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잠재성장률 3% 회복을 주요 정책과제로 내세웠습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부총리급 인구전략기획부를 만드는 겁니다. 한국은 인적자원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인적자원을 계속 공급하기 위해선 출산율이 뒷받침돼야 하고, 각 분야에 훈련된 전문 인력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정부 조직을 어떻게 개편해야 할까요.
“한국에서 가장 빨리 개혁해야 할 부처가 보건복지부입니다. 보건과 복지를 하나의 부처가 담당하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보건복지부의 복지 부문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여성가족부 등을 전부 합쳐 사회부총리가 이끄는 인구전략기획부로 개편해야 합니다. 경제와 사회 영역에 구애받지 말고 인구 정책은 모두 인구전략기획부가 조율해야 합니다. 보건 부문은 바이오산업이 급성장하는 데 맞춰 식품, 위생, 감염병, 의학, 약학 등을 담당하는 보건위생부로 분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국인 근로자 유치도 과제입니다.
“이민법 소관 부처도 법무부에서 인구전략기획부로 옮겨야 합니다. 검찰은 이민법을 불법체류자나 범죄자 양산을 막는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외국인 근로자를 내보내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기업의 인력 수요에는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직업교육기관인 한국폴리텍대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이미 캄보디아에서 현지 인재를 교육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폴리텍대 출신 현지 인재를 먼저 채용해보고 우수하면 본사로 데리고 오는 방식입니다.”
▷패권 경쟁이 첨예해지고 있습니다.
“인구 위기와 함께 가장 시급한 과제가 패권 경쟁에 대응해 연구개발(R&D) 예산을 크게 늘리는 겁니다. 미국과 중국 등의 첨단 과학기술 경쟁을 ‘패권 경쟁’으로 부르는 이유는 1등만 살아남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패권 경쟁에서는 해킹·스파이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1등을 하려 합니다.”
▷경쟁국들은 정부가 적극 지원하는데요.
“세상에 없는 첨단 과학기술을 개발하려면 수천조원 자금이 필요하지만 성공률은 50% 정도입니다. 이 리스크를 모두 떠안을 민간 기업은 없기 때문에 미국 중국 일본 등 패권 경쟁을 벌이는 나라는 정부가 투자금의 절반가량을 보조해 줍니다. 실패해도 연구 과정에서 나오는 부수 기술을 국가 경제에 활용할 수 있어 정부 입장에서는 효과적인 R&D 지출입니다. 반면 우리는 정부 지원이 세계에서 가장 약합니다.”
▷한국이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래 경제를 이끌 약 30개 기술 가운데 적어도 5개 분야에서는 1등을 해야 세계 경제에서 명함을 내밀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부 지원이 부족하다 보니 오히려 반도체, 디스플레이, 조선, 원전 등 어렵게 확보한 세계 1위 기술을 중국에 뺏기고 있습니다.”
▷반도체 같은 산업을 지원하면 대기업 특혜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한국만 아직까지 일차원적인 ‘공평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술 우위가 있는 분야에서 초격차를 달성하려면 과감한 투자밖에 방법이 없어요. 대기업을 도와주는 게 아닙니다.”
▷R&D가 방만하거나 비효율적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에서 500억달러를 빌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R&D 투자를 늘렸습니다. 연구자 개인을 지원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대학·연구소 등 기관을 지원하는 제도적 특성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의 낭비는 인정해야 합니다.”
▷소위 ‘S급 글로벌 인재’를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 석·박사급 엔지니어의 평균 연봉은 5억원 정도입니다. 이들이 원하는 생활 환경을 모두 만족시키는 곳은 수도권뿐입니다. 이런 수요를 잘 읽고, 인재를 모으는 데 성공한 나라가 영국입니다. 수도 런던에 유럽 최대 스타트업·디지털 기업 클러스터인 ‘테크시티’를 만들었습니다. 프랑스와 일본도 수도 파리, 도쿄 근교에 첨단산업을 한데 모았습니다. 한국도 수도권에 세계 1위를 노리는 분야의 기업과 인재를 집중적으로 유치하는 ‘R&D 파크’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전국을 5개의 초광역권과 3개의 특별자치도로 재편하는 공약을 내놨는데요.
“거점 도시 하나를 만들어 독자적인 경제권을 키우려면 30~40년이 걸립니다. 인재를 지역으로 분산하려 해도 최고 수준의 연구인력은 판교까지밖에 안 내려갑니다. 실천할 수 있는 지역 균형 발전이 필요합니다.”
▷쟁점 법안은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는 ‘원샷’으로 해치우려 하지 말고 ‘스텝 바이 스텝’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노란봉투법은 노조가 2조(하청업체 근로자의 원청 기업에 대한 교섭권 인정)를 양보하고 3조(기업의 손해배상 청구 제한)만 먼저 고치는 식으로요. 상법 개정안도 쟁점 6~7개 가운데 상대적으로 논란이 적은 2개를 먼저 고치고, 하나씩 수정해 나가면 됩니다.”
■ 김진표 전 국회의장 약력
△1947년 경기 수원 출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1974년 제13회 행정고시 합격
△1999년 재정경제부 세제실장
△2001년 김대중 정부 정책기획수석
△2002년 국무조정실장
△2003~2004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2005~2006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2017년 국정기획자문위원장
△2022~2024년 제21대 국회 후반기 의장
△17·18·19·20·21대 국회의원
△2024년~현재 글로벌혁신연구원 이사장
정영효/남정민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