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진 "흥행 안 되더라도 '의미' 때문에 출연하기도 하죠" [인터뷰+]

입력 2025-06-09 13:19
수정 2025-06-09 14:57
"흥행이 안 되더라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 있습니다. 안 될 걸 알고 있지만 그런 '의미'만을 가지고 출연하기도 하죠."

지난 5월 30일 개봉한 영화 '소주전쟁'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소주 회사가 곧 인생인 재무이사 종록(유해진)과 성과만을 추구하는 글로벌 투자사 직원 인범(이제훈)이 대한민국 국민 소주의 운명을 걸고 맞서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이 작품은 유해진, 이제훈이 주연을 맡아 기대를 모았으나 2주차 누적 관객 수 26만 명에 그쳤다. 유해진은 "개봉 전 예매가 약간 주춤했다. '슬슬 힘 받겠지', '시동 걸리겠지' 싶었는데 아쉽다"고 털어놨다.

"어쨌든 요즘은 오락적인 영화를 많이 보는 것 같아요. 계절도 그렇고 말이죠. '소주전쟁'은 생각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흥행이 됐으면 좋겠는데 한 끗 차이인 것 같아요. 영화의 운명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역주행'에 대한 희망은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 유해진은 "전반적으로 좀 달라 진 것 같다. 예전엔 개봉하면 쭉쭉 치고 올라갔는데 이제는 입소문이 나면 가서 보는 것 같다. 뒷심이 받쳐주면 좋을 것 같다. 무대인사 하면서 보니 IMF를 알만한 분들, 그 시절을 살아내신 분들이 많더라"고 말했다.


'소주전쟁'에서 유해진은 국보그룹이 IMF로 파산 위기에 처하자 투자사와 법무법인을 만나며 회식으로 찾은 식당에서 소주 판촉까지 해 가며 발로 뛰어 회사를 구하려 노력하는 종록 역을 연기해 인간미를 보여줬다.

그는 IMF 시절을 떠올리며 "요만큼도 힘든 게 없었다"고 했다. "당시 극단 생활할 때인데 원체 힘들었기 때문에 IMF라 힘들다는 건 몰랐어요. 매체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힘들구나' 싶었습니다. 당시 홍릉 근처 살 땐데 대학로 갈 버스비 아껴 소보로빵 하나 사 먹고 이럴 때였죠. 늘 힘들었으니까 피부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유해진은 자신의 아버지와 또는 이웃의 아버지 등을 떠올리며 종록을 연기했다고 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집은 뒷전이고 자기 일이 전부인냥 살았던 아버지들이 엄청 많다. 못 사는 삶은 아니지만, 가정보다는 일이 중요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 아버지도 가정적이지 못했다. 잘 사는 집 빼놓고는 보통 그랬던 것 같다. 성질 나면 상 엎고, 옆집서 싸우는 소리 막 들리고. 너무 흔하게 있었던 일이다. 그런 걸 생각하며 연기했다"고 덧붙였다.

종록은 무너져가는 회사를 지키겠다는 강한 책임감과 신념을 바탕으로, 결국 인범에게 모든 것을 맡기며 손을 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가치관을 드러낸다. ‘회사는 곧 인생’이라고 믿는 종록과, ‘회사는 단지 돈을 버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인범의 시선이 부딪히면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미묘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종록에 대해 유해진은 "요즘 세상에 종록처럼 산다면, 그럼 혼자 살아야 할 것 같다"며 "가정이 있다면 가정을 돌보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영화 속 인범과 가치관의 차이를 보이는 것에 대해 "그게 바로 우리 영화의 '밸런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작품이 '소주전쟁'이라며 "가치를 어디에 두며 살 것인가. 요즘 세상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덕지가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보그룹 후계자 진우 역을 연기한 손현주가 몸을 사리지 않는다며 한참을 걱했다. 그는 "열정이 너무 많은 것 같다. 툭툭 박을 때 분노가 쌓이게끔 해주는 빌런 역을 잘 해준 것 같다. 그래도 요령을 좀 피워가며 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액션에선 요령 있게 하는 편"이라며 "예전에 큰 사고가 있고 나서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다. 욕심내서 다 하려고 했는데 못 하는 게 있으면 과감하게 이야기한다. 그래야 오래 일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해진은 '공조2: 인터내셔날', '올빼미', '달짝지근해:7510', '파묘', 올해 '야당'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자신만의 색깔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내가 이 작품 왜 했지?'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도 있어요. 결과를 봤을 때 왜 이렇게밖에 못 만들었지, 나의 문젠가 하고 고민하기도 해요. 하지만 '소주전쟁'은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던 작품입니다. 지키려는 사람과 가져가려는 사람. 드라마로 쭉 따라가면 관객이 쫓아가 지겠다고 하는 안도감은 있었습니다."

유해진은 2030 세대가 '소주전쟁'을 꼭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그는 "요즘 세대는 큰 걸림 없이 쭉 흘러가길 바라는데 그 흐름에 인터미션(휴식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지, 그런 의미에서 필요한 작품이다. 인터미션과 같은 작품이지 않나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28년 동안 수많은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유해진은 "내가 했던 모든 작품에 고마움이 있다"며 소회를 전했. 그는 "어떤 건 섭섭하기도 하고 때론 현장에서 짜증이 났던 작품도 있다. 어떤 작품은 '내가 쉬느니 이거라도 하면 좋겠다' 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 모든 작품이 고맙더라. 내가 더 좋은 작품을 만나게 해주는 희생 해주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흥행이 안 되더라도 '의미'만 가지고 하는 게 있다"고 털어놨다.

그래서 유해진에게 '무사'(2001)는 아주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맨날 양아치, 건달 연기만 할 때였어요. 내 '본 투 비 양아치인가' 할 때도 있었죠. 그런 생각에 지쳐 있을 때였는데 다른 오디션을 보러 갔다가 '무사'의 김성수 감독을 만났죠. 그렇게 캐스팅이 된 거예요. '무사'를 찍으면서 중국 가서 흙먼지 먹으며 고생하고 많이 배웠습니다. 고생 1순위라면 '무사'를 꼽아요. 하지만 그 작품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유해진은 콘텐츠 시장이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OTT 작품에 출연하지 않는 배우다. 현재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촬영 중이며 최근 '암살자들' 캐스팅 소식도 전해졌다. 그는 "요즘 너무 어려워서 '영화 한다'고 하면 '뭐?' 라고 놀라기도 한다"고 말했다.

"영화계가 많이 어려운데 그런 면에선 너무 행복합니다. 저랑 같이 연극했던 동료들이 '왕과 사는 남자'에 단역으로 나와요. 같이 한잔하며 이야기하는데 정말 드문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고 싶은 거 하며 산다는 거 축복받은 거죠. 내가 맛있는 걸 먹고 있을 때, 후배들 밥값 걱정 안 하고 밥을 사줄 때,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된 지 오래 됐잖아' 하실 수 있는데 확확 밀려올 때가 많아요. 닭도리탕 먹고 동치미국수 먹는데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