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6월 04일 14:22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이재명 정부 출범에 맞춰 자본시장과 투자은행(IB)업계에선 기업을 둘러싼 '돈맥경화'를 시급히 해소해달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직전 정부의 계엄 사태 이후 금융권 대출에서 주식자본시장(ECM), 채권자본시장(DCM), 인수합병(M&A) 등 자금조달을 위한 모든 시장이 경색되면서 불거진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는 지적이다.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하고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적기 투자가 가능하도록 통로를 뚫어줘야 한다는 공통적인 조언이 나온다.
4일 IB 업계에 따르면 자본시장 인사들은 새 정부가 기업의 자금조달을 둘러싼 전방위 악재들을 해소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회사채, 유상 증자, 상장(IPO) 등을 통한 직접 금융과 금융권 차입 등 간접금융 통로가 모두 막혀있는 상황을 해소해야한다는 호소다.
SK그룹과 한화그룹 등 대규모 투자로 자금 소요가 큰 그룹을 포함해 석유화학, 배터리, 태양광, 철강 등 업황 악화를 겪고 있는 기업들에 대한 은행권 차입 한도는 이미 채워졌거나 축소되가고 있다. 여기에 더해 100조원대 현금부자이자 차입을 꺼려오던 삼성전자마저 수십년만에 은행 차입 문화를 열면서 대출이 초우량 기업으로 쏠리는 현상이 벌어질까 우려하는 관측도 나온다.
은행권 대출을 보완하는 역할을 맡는 직접 금융 시장에서도 곳곳에서 파열음이 일고 있다. 회사채 시장은 홈플러스 여파로 중·저신용 기업들의 진입이 여전히 막힌 가운데 MBK파트너스 등 PEF에 대한 '책임론'은 새 정부에서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수사와 법정 공방 속에서 홈플러스의 실질적인 구조조정은 뒤로 밀리고, 이 여파로 비우량기업 회사채 투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지속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퇴임과 함께 검찰식 '군기 잡기' 기조가 막을 내릴 것이란 기대가 나오지만 새 정부 들어 새로운 방식의 규제들이 기업 자금 조달에 걸림돌이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그간 당국의 철퇴로 삐걱거려온 대규모 유상증자가 대표적이다. 상법 개정안 등을 통해 주주자본주의를 최우선 순위로 삼겠다는 새 정부 하에서 기업들이 단기적으론 주가 조정 가능성이 큰 유상증자를 꺼내긴 쉽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다.
지난해 7월부터 시행된 상장법인 주요 주주의 '블록딜 사전공시제' 여파를 우려하는 기업도 있다. 지분율 10% 이상 주요 주주가 발행 주식 수 1% 이상 또는 50억원 이상 지분 매각 시
30일~90일 전에 미리 공시해야한다. 예를 들어 LG에너지솔루션 지분 81.84%를 보유한 LG화학이나 자회사 SK IET 지분 61.2%를 보유한 SK이노베이션이 경영권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지분 일부를 매각하려면 사전 공시 대상이 될 수 있다. 두 회사 모두 재무구조 악화를 겪고있어 현금 확보가 시급하지만 주가 하락을 우려한 소액 주주들의 극심한 반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기업들의 자금조달 방안 중 하나였던 자사주 활용도 당분간 봉쇄될 전망이다. 원칙적으로 자사주를 소각 대상으로 삼겠다는 기조에 따라 교환사채(EB)발행과 자사주 교환 등으로 현금 여력을 확보하거나 지배력을 강화하는 기업들의 행보에도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커지면서다. 선거 4일 전 자사주를 기반으로 3100억원 규모 EB발행하겠다고 발표한 SKC와 자사주 교환으로 경영권 방어를 택한 대한항공과 LS그룹 등 '막차'를 탄 그룹들도 있지만 때를 놓친 기업들의 고심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정부가 M&A시 공개매수 의무화 기조를 천명하면서 상장사 M&A가 위축될 것이란 목소리도 나온다. 이미 대기업들이 국내 M&A 비중을 대폭 줄여가는 상황에서 지분 100%를 인수하기 위해 같은 비용을 소요하느니 해외 기업 인수로 아예 선회할 것이란 시각이다. PEF의 양극화를 촉발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수조원대 블라인드펀드를 보유한 PEF들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지분 전량 공개매수 후 상장폐지 전략을 활용할 수 있지만 중소형PEF들은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PEF를 통한 밸류업 효과를 직접적으로 받는 중소 규모 바이아웃 거래가 위축되면서 M&A 시장 경쟁력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시각이다.
여기에 더해 중복상장 금지와 상법개정안 등 IPO에 대한 요건이 더욱 까다로워지면서 공모시장을 통한 기업들의 자금조달에도 애로사항이 클 것이란 것도 기업들의 걱정이다. 과거 PEF로부터 IPO를 약속하고 대규모 자금을 차입한 기업들은 투자에 활용해야할 현금을 이를 상환하는 데 소진할 가능성도 짙다.
자본시장 관계자들은 새 정부 자본시장 정책의 첫 시험대가 곳곳에 산적한 자금조달을 둘러싼 기업들의 우려를 해소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조언한다. 새 정부가 천명한 반도체, 배터리, 미래차, 수소차, 우주항공, 바이오, 문화산업 등 전략사업들에 대한 경쟁력 강화를 위해선 기업들이 적기에 대규모 투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자금 순환이 선제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자본시장에선 '검사 권력'을 이용한 전 정권의 방식 대신 소액주주 여론을 등에 업은 '입법 권력'을 이용한 문턱들이 등장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며 "출범 초기에 기업과 시장에 힘을 실어주는 조치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준호 기자 cha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