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이프이스트-이성득의 아세안 돋보기] 동남아에 온 프랑스가 한국에 남긴 숙제

입력 2025-06-05 17:38
수정 2025-06-05 17:39
하노이에 도착한 전용기에서 영부인에게 맞는 듯한 장면이 사진으로 찍혀 화제를 모은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지난 5월 25일부터 30일까지 6일간 진행된 이번 순방에서 프랑스는 단순한 원전 및 방산 세일즈 외교를 넘어, 미국과 중국을 대신할 수 있는 제3의 대안으로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일본 총리 방한처럼, 한때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이 프랑스를 전폭 환영하기는 쉽지 않기에, 프랑스 또한 과거 식민 통치의 부담감을 안고 동남아를 찾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마크롱 대통령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싱가포르를 잇는 5박 6일의 순방 동안,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속에서 방향을 고민하는 아세안 국가들에 ‘프랑스’라는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했다.

순방의 첫 국가였던 베트남에서 마크롱은 과거사 언급 없이 서로를 ‘포괄적 전략 파트너’라 명명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에어버스 항공기 20대를 공급하는 60억 유로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으며, 동시에 고등교육, 수자원 관리, 기후 기술 등의 협력 강화를 통해 기술 동맹을 약속했다. 특히 프랑스어 교육 부활과 디지털 아카이브 프로젝트는 양국 간 인문적 연대의 토대를 더욱 견고히 다졌다.

인도네시아 방문은 성과가 가장 두드러진 일정이었다. 프랑스는 라팔 전투기 42대, 스코르펜급 잠수함 2척, 탈레스 장거리 레이더 13기를 포함한 약 110억 달러 규모의 방산 계약을 성사했다. 하지만 마크롱은 이 계약을 단순한 상업적 거래에 그치지 않도록 연출했다. 그는 세계문화유산인 보로부두르 사원을 방문하고, 프라보워(Prabowo Subianto) 대통령에게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훈장’을 수여하며 양국 관계에 문화적·정치적 상징성을 부여했다. 또한 문화유산 보존 협력 및 이를 위한 연구센터 설립 논의는 양국 협력 범위를 문화 창작 산업까지 확장했다.

싱가포르에서는 아시아 안보 회의(Shangri-La Dialogue)에서 핵심 연설자로 나서, 유럽과 아시아가 자율성을 기반으로 전략적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프랑스가 강대국 간 조정자가 아니라, 신뢰와 균형 외교를 지향하는 행위자(Actor)로 나설 수 있음을 역설했다. 이는 지정학적 중간지대에 위치한 동남아 국가들에 유럽과 새로운 협력 축을 제안하는 데 성공한 메시지였다.



하지만 마크롱 대통령의 성공적인 순방 성과를 접하며 우리 마음은 영 불편하다. 인도네시아가 프랑스에서 구매하기로 한 전투기와 잠수함은 한국과 인도네시아 양국이 진행해 온 사업들과 겹치기 때문이다.

KF-21 사업은 한국이 주도하고 인도네시아가 20%의 개발비를 분담하는 구조로 시작되었으나, 약속된 1조 6,000억 원 중 약 3,800억 원만 납부되었고, 잔여 분담금 납부는 지연되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인도네시아의 분담금을 6,000억 원으로 감액했지만, 잔여 분담금 지급은 여전히 미뤄지고 기술 유출 문제로 인도네시아 기술진의 출국이 제한되며 양국 간 긴장 관계도 계속되고 있다.

잠수함의 경우, 2011년 대우조선해양(현재의 한화 오션)이 3척을 공급하며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잠수함 수출을 기록했지만, 이후 품질과 가격 등에 대한 양국 이견과 2021년 우리가 정비한 인도네시아 잠수함의 침몰 사고로 인해 후속 사업은 중단되었다. 결국 첫 단추를 끼우는 데는 성공했으나 마무리하지 못한 채, 인도네시아는 프랑스를 새로운 파트너로 선택한 모양새다.

물론 국가 간 관계와 협력이 정상 회담 한 번에 양해각서 몇 장으로 모두 성사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프라보워 대통령은 2024년 4월에 국방장관이자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가장 먼저 중국을 방문한 후, 한국을 건너뛰고 일본을 찾았다. 2024년 11월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10개 이상의 국가를 방문했지만, 그 목록에 한국은 없다. 애초 KF-21 및 잠수함 사업 논란도 그의 국방장관 재임 시절 불거졌던 만큼, 현재까지 프라보워 대통령과 한국 간 ‘케미’는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 그 뒤를 이은 수하르토 정부 모두에서 장관을 지낸 아버지를 둔 명문가 출신이다. 인도네시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특전사령관, 전략예비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사위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 역사상 수하르토, 유도요노 대통령에 이은 세 번째 군 장성 출신 대통령으로, 평생을 권력 중심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따라서 권위적이고 일방적인 면이 강하지만, 이번 프랑스 무기 계약은 단지 프라보워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정부가 외교적으로 어떤 나라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리고 이 인식은 인도네시아가 대표하는 아세안 다수 국가의 시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24년 기준 한국과 아세안(ASEAN) 간 교역 규모는 약 1,933억 달러로 집계되며, 이는 전년 대비 3.6% 증가한 수치다. 아세안은 한국의 두 번째로 큰 교역 파트너로서, 지난 50년 동안 백 배 넘게 성장했다. 폭증한 교역량이 말해 주듯, 아세안 국가들도 한국이 전쟁 이후 가난을 딛고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한 나라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과거엔 똑같은 식민지였고, 1950~70년대에는 한국보다 더 잘 살았던 동남아 국가들도 있다. 그들이 보기에 '기술'과 '제품'만 있고 정서적으로 공감하거나 함께 성장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면, 결국 우리는 잠시 반짝하는 ‘졸부’로 비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여전히 ‘기술’과 ‘제품’, '한류'가 현상을 유지해 주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지만 이제 동남아는 관계의 질과 상호 존중의 방식을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 ‘지원자’ 또는 ‘공급자’로서의 시선을 버리고, ‘함께 성장하는 친구’로서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언어, 태도, 접근법 모두 수평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이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는 한국에서, 다시 ‘新-新 남방 정책’을 숙고하고 설계할 필요가 있다. 아세안을 단지 ‘수출 시장’이나 ‘지원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진정한 파트너로서, 먼저 손 내미는 친구로서, 진심 어린 외교 관계를 설계해야 할 때다. 더 멀리서 동남아로 날아온 프랑스 대통령이, 더 가까이 있는 우리에게 묵직한 숙제를 남기고 갔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이성득 인도네시아 UNAS경영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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