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스한 갈색 머리를 늘어뜨린 채 배춧잎을 우적우적 씹어먹는 한 여자. 육식을 끊고 스스로 식물이 되기로 한 그의 눈빛은 공허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결연하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의 대표작 <채식주의자>가 무대 위에서 되살아났다. 이탈리아의 동명 연극(La vegetariana)이 22회 부산국제연극제 폐막작으로 초청돼 지난달 31일부터 이틀간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공연했다.
채식을 선언한 주인공 영혜는 이탈리아 배우 모니카 피세두가 맡았다. 영혜의 남편과 형부, 언니 인혜까지 모두 이탈리아 배우가 연기했다. 한국어 자막 없이는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국내 초연하는 이번 작품을 보기 위해 이틀간 1200여 명이 공연장을 찾았다. 작년 11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세계 초연한 뒤 프랑스 파리 등에서 공연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번 무대를 연출한 다리아 데플로리안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를 주변 인물의 시선으로 풀어냈다. 소설과 가장 큰 차이는 폭력적이거나 성적 묘사가 담긴 장면을 최대한 덜어냈다는 점이다.
‘인간의 폭력성’을 다룬 주제 의식이 약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혜 남편의 난폭함은 소설보다 무대 위에서 더 직관적으로 표현됐다.
새로 추가한 장면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다. 영혜가 배추를 먹는 장면과 TV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장면은 작품의 분위기를 극대화하기 위한 연출의 선택이었다.
영혜 역의 모니카는 실제로 채식주의자다. 군살 없는 몸으로 10여 초간 물구나무서기를 할 때는 소설 속 영혜가 튀어나온 듯했다. 연출가이자 영혜 언니 역을 맡은 다리아도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풍부한 표정 연기를 보여줬다. 그 덕분에 이탈리아어로 한국 작품을 연기하는 것에 이질감이 크지 않았다. 귀를 타고 흘러가는 이탈리아어의 리듬감도 110분 공연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데 한몫했다.
원작의 노골적 표현이 버거운 독자라면 ‘순한 맛’ 버전의 연극을 더 편안하게 느낄 수 있다. 채식주의자는 오는 7월 그리스 아테네, 10월 스페인 마드리드, 내년 1월 스위스 로잔 등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부산=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