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가지 원료 엑기스만 뽑았다…외국인 열광한 '마법 스프' 탄생

입력 2025-06-01 18:02
수정 2025-06-09 15:34
“북미 시장을 타깃으로 한 라면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면 그런 요청이 들어온 날로부터 석 달이면 담당자 손에 신제품을 건넬 수 있어요.”

지난달 29일 서울 신대방동 농심 본사 도연관 7층 연구개발(R&D)센터. 미국 입맛을 공략하기 위한 기획 회의가 열렸다. 라면 연구개발실 연구원들과 해외 영업 담당자, 해외 법인 직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댔다. 윤재원 농심 라면개발실장은 “수십 년간 쌓아온 연구개발 노하우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라면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며 “기획부터 생산까지 최소 3개월이면 끝난다”고 말했다. 시장이 생겨나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개발 역량 때문에 출시를 포기하는 일이 농심에서는 없다는 말이다. ◇ 전 세계 MZ 트렌드까지 공략1일 대체 데이터 플랫폼 한경에이셀(Aicel)에 따르면 지난 4월 한국이 미국에 수출한 라면은 전년 동월 대비 52.7% 늘어난 2532만달러(약 350억원)에 달했다. 미국 현지 공장에서 생산한 물량을 제외하고도 올해 미국으로 직접 수출하는 라면만 4000억원어치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뿐만 아니다. 중국(25.7%) 일본(37.7%) 러시아(66.1%) 사우디아라비아(177.3%) 등의 라면 수출(4월 기준)은 세계적으로 늘었다.

한국 라면의 1차적 인기 요인은 맛이다. 농심이 전 세계 소비자를 대상으로 최근 진행한 조사에서 K라면을 재구매하는 요인으로 ‘깊은 국물 맛’을 첫손에 꼽았다. 농심은 야채, 고기 등 원재료를 각각 분말로 만든 뒤 하나의 스프에 혼합한다. 진공 상태로 60도 정도의 저온에서 수분을 없애는 기술이 활용된다. 농심은 건더기 스프를 만들 때 신맛 발생 없이 수소이온농도(PH)를 낮춰 보관기간을 늘린다. 동결 건조 방식으로 바람에 면을 말리는 건면 기술 등도 있다.

장기간의 노하우는 모듈화를 거쳐 수출 첨병으로 거듭났다. 스프의 분말 배합 데이터 등은 단선적으로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이 원하는 입맛을 다양한 방식과 빠른 속도로 맞춰낼 수 있도록 뭉쳐놨다. 모듈화는 한국 기업의 강점인 스피드를 십분 살려냈다. 농심 관계자는 “예전에 신제품을 개발할 때는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느낌이 강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며 “이미 개발된 부품을 조립하는 식으로 제품을 내놓을 수 있다 보니 한국은 물론 글로벌 MZ세대 소비자의 트렌드 변화 속도를 빠르게 쫓아가는 식품회사가 됐다”고 말했다. ◇ 불닭 열풍 이끈 연구개발 13년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은 라면 수출을 주도하고 있다. 삼양식품의 면 사업부 수출액은 지난해 1조3064억원으로 전년 대비 64.6% 늘었다. 불닭볶음면이 SNS를 타고 글로벌 히트 상품으로 떠오르면서 국내 시장보다 해외 시장을 더 중시하는 모습이다. 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국내에 먼저 출시하고 반응이 좋으면 수출이 이어지는 방식이었는데 이제는 180도 바뀌었다”며 “처음부터 해외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연구개발이 익숙해졌다”고 말했다.

삼양식품은 2012년 첫선을 보인 불닭볶음면 이후 다양한 수출용 제품을 개발했다. 통관 규제와 문화적 차이 등을 고려해 한국 제품에 들어가 있던 닭고기 원재료를 빼고, 닭맛을 그대로 구현한 기술을 넣었다. 지난해 삼양식품 연구개발 제품 97개 중 36개가 불닭 관련이다.

삼양식품이 해외 시장에서 선전하는 배경도 결국은 기술이다. 액상스프는 생산, 보관, 유통 과정이 분말스프보다 더 까다롭다. 짜짜로니 액상스프 제조 노하우가 큰 도움이 됐다. 25년 차 연구원으로 ‘불닭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병훈 삼양연구소장은 “불닭볶음면 액상스프에서 원재료의 맛과 향을 액체로 담는 기술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