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이틀 앞둔 지난 1일 저녁 7시 30분 광화문 광장. 수 개월간 집회, 시위, 선거운동의 소음으로 가득찼던 이곳에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가 울려퍼졌다. 서울시오페라단(단장 겸 예술감독 박혜진)이 창단 40주년을 맞아 세종문화회관 앞 중앙계단에서 준비한 야외 오페라가 시작되면서다. 이날부터 이틀간 열리는 이 공연은 137명의 시민들이 무대에 함께 올라 '한국형 광장 오페라'의 가능성을 검증한 현장이었다.
서울의 이야기 담은 오페라
세종문화회관에 상주하고 있는 서울시오페라단은 전용 오페라극장이 없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극장이 없어도 공연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광화문 중앙계단은 임시 무대였지만, 그 위에서 피어난 오페라의 공동체적 힘은 강력했다. 공연 전 기자간담회에서 박 단장은 "서울시민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인 마술피리는 본래 ‘징슈필(Singspiel)’ 형식이다. 독일어 노래와 함께 배우들이 연극처럼 대사를 주고받는 독특한 오페라 장르다. 이번 공연은 그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한국어 대사와 독일어 노래를 병기한 형식으로 서울식 해석을 시도했다. 대사 속에는 ‘세종대왕’, ‘이순신’, ‘아리수’와 같은 서울의 상징물이 다수 등장했다. 외국 작품에 단순 번역을 덧붙이는 것을 넘어서, 오페라 안에 ‘서울’을 입히려는 시도가 돋보였다.
시민이 주인공이 된 오페라
이번 무대의 중심엔 137명의 시민합창단이 있었다. 전직 승무원, 시니어합창단, 서울시 여성합창단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모두 독일어 가사를 외워 무대에 올랐다. 리허설 일정은 이들의 퇴근 시간에 맞춰 조정됐다. 오케스트라 단원 60여 명과 지휘자 김광현, 프로 성악가들까지도 기꺼이 시민합창단의 일상에 맞춰 리허설 시간을 늦은 저녁 시간으로 조정했다.
시민합창단의 노래와 움직임은 단순히 ‘실력’을 논하는 것을 넘어 그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발음 하나, 음 하나를 몸에 익히기 위해 수개월을 바친 이들의 출연은 한국 오페라사에서 유례없는 기록으로 남게 됐다. 단지 아마추어의 참여라는 수준을 넘어 예술을 통한 공동체 실현의 상징적 순간이었다. 음악과 무대, 이야기와 삶이 하나로 만나는 오페라의 본질이 시민합창단의 목소리 속에 녹아 있었다.
기다릴 줄 알았던 오페라
열정의 무대 뒤엔 혼란도 있었다. 5월 31일 오후 4시 30분, 광화문광장에선 '마술피리'의 드레스 리허설이 한창이었지만 같은 시각 6.3 대선을 앞둔 보수 집회와 1인 시위가 겹쳐 음향 체크조차 힘들었다. 야외 공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음향 리허설이 사실상 무산된 상황. 세종문화회관 안호상 사장과 서울시오페라단 박혜진 단장도 수시로 리허설 현장을 찾아 시위대와 오페라 리허설의 음향 충돌을 체크할 만큼 현장 상황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그날 저녁 6시 30분부터 시작된 B 캐스팅 리허설은 정확히 7시 55분에 음악을 멈췄다. 저녁 8시 1인 시위를 예고한 시민의 권리를 배려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저녁 8시 정각, 시위는 재개됐다. 이 같은 상황을 극복하고 오페라 무대 위에 오른 성악가들의 활약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광장을 울린 목소리들
1일 공연에 출연한 타미노 왕자 역의 테너 김효종(A팀)은 모차르트 오페라에 걸맞은 미성과 명확한 딕션, 자연스러운 대사 처리로 극을 이끌었다. 새잡이 파파게노 역의 바리톤 전병권(A팀)은 능청스러운 연기력과 안정된 발성으로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자아냈다.
평소 자신을 '오페라 덕후'라고 소개할 만큼 오페라에 애정을 가진 지휘자 김광현은 한경아르떼필하모닉의 음악적 중심을 흔들림 없이 잡아내며 공연 전체를 안정감 있게 이끌었다. 성악가와의 격의 없는 소통, 단원들과의 유기적인 호흡을 통해 ‘서울시민을 위한 광장 오페라’라는 도전적인 실험을 음악적으로 완성했다.
이 공연이 주목받은 이유는, 단지 무료 야외 공연이어서가 아니다. 독일 고전 오페라의 형식을 지키면서도 한국어 대사와 서울의 맥락을 자연스럽게 덧대 'K-오페라'의 방향을 새로 제시한 무대여서다. 해외에는 이미 비슷한 행사들이 전통이 되어가고 있다. 오스트리아 빈의 시청 광장에선 매년 여름 빈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가 시즌을 끝낸 휴가 기간에 '빈 필름 페스티벌'이 열린다. 음악의 도시 '빈'의 주요 무대에 올랐던 명작 오페라와 클래식 실황이 무료로 상영되고, 사람들은 음식과 함께 오페라를 피크닉처럼 즐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도 공연장의 앞뜰과 주변 공간을 활용해 관객을 극장 앞마당에 초대하는 '코트야드 오페라'로 문턱을 낮추는 실험을 하고 있다.
오페라 '마술피리'는 2일까지 계속된다. 2일 프로덕션(B팀)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목은 ‘밤의 여왕’ 역 콜로라투라(화려한 기교와 높은 음역대를 소화하는) 소프라노 문현주의 가창이다. 31일 드레스 리허설 현장에서 미리 만난 문현주는 거센 바람과 불안정한 음향 환경 속에서도 흐트러짐 없는 호흡과 정확한 음정, 극적인 표현력으로 현장을 압도했다. 특히, '밤의 여왕의 아리아'로 잘 알려진 ‘Der Holle Rache(지옥의 복수가 내 마음에서 끓어오른다)’의 마지막 고음의 순간은, 계단 무대를 타고 광화문 전역에 울려 퍼지며 객석 너머로 지나가던 시민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