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엄마 아닌 진짜 '나'를 만났다…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리뷰]

입력 2025-05-16 15:52
수정 2025-05-16 22:40

"주부로만 지내다가 진짜 나를 찾은 것 같아요."

무언가가 들어있는 쇼핑백을 들고 고민만 수십 번을 하던 프란체스카. 그녀가 용기를 내어 꺼내든 건 밝은색의 원피스였다. 아이오와 시골 마을에 사진을 찍으러 온 이방인 로버트 킨케이드 앞에서 프란체스카의 심장은 뛰었다. 누군가의 아내, 엄마로서 해야 할 역할에 충실했던 그녀는 로버트와 함께하는 공간에서 낯선 감정을 느꼈고,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꿈과도 마주했다. 낡은 셔츠를 벗고 원피스를 입었다. 이건 '새로운 나'가 아닌, '진짜 나'라고 그녀는 말했다.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삼연으로 7년 만에 한국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작품은 1992년 발매돼 전 세계 40여개국에서 5000만부 이상 판매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메릴 스트립·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영화로도 유명하다. 젊은 시절 화가의 꿈을 묻어둔 채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가던 프란체스카가 로버트를 만나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을 그린다.

1965년 미국의 고요한 시골 마을 아이오와. 프란체스카는 오랜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게 됐다. 남편 리처드 버드 존슨이 아들·딸을 데리고 일리노이주의 농업박람회 참가하기 위해 떠나면서 생긴 휴가였다. 버드 존슨은 아내를 어떻게 혼자 두냐며 걱정했지만, 프란체스카는 잠시의 틈도 주지 않는 살림의 연속에서 벗어나 나만의 시간을 즐길 생각에 왠지 모를 설렘까지 느꼈다.

아이들과 남편을 배웅하고 찾아온 평온함. 태양이 내리쬐는 옥수수밭의 열기만이 유일한 벗으로 느껴질 정도로 고독한 마을. 그 사이에서 카메라를 든 로버트가 나타났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인 그는 매디슨 카운티에 있는 '로즈먼 다리'를 찍으러 왔다며 프란체스카에게 길을 물었다. 그렇게 운명의 끈이 이들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의 곁에서 행복함을 느꼈다. 찬장 안쪽에 오랫동안 박혀 있었던 브랜디를 꺼내 마셨고, 자기 고향인 이탈리아식 채소 스튜도 만들었다. "내가 나였던 게 언제였는지"라는 그녀에게 로버트는 '나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남자였다. 전쟁을 피해 미군이었던 남편 버드 존슨을 따라 미국행을 택했던 과거를 털어놓을 수 있었다. 로버트가 보여준 고향 이탈리아 피렌체의 사진에 울컥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이루지 못했던 화가의 꿈까지 어느새 가슴 한편에서 고개를 들었다.

로버트와의 시간은 행복했지만, 지나치게 잔혹하기도 했다. 그와 있을 때마다 걸려 오는 남편의 전화는 프란체스카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남편과 자식들에게도 사랑받는 엄마였기에 프란체스카의 상황은 더욱 고통스럽기만 하다. 사실상 불륜이다. 하지만 소재의 불편함을 중화하는 섬세한 구조적 접근과 내면의 표현이 작품성을 확 끌어올렸다. 1막 내내 두 사람이 처한 환경과 내면을 집중적으로 조명, 관계성을 보여주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관계를 다져나가는 과정을 긴 호흡으로 가져가면서 설득력을 높이고 인물에 깊이 동화하게 만드는 탁월한 선택이다.

아울러 프란체스카와 로버트 사이에는 단순한 사랑 외에 시대상과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하나의 사건에서 시작된 개인의 복잡한 심경과 선택이 삶의 메시지로 확장돼 큰 울림을 준다.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것"이라며 프란체스카에게 떠나자고 제안하는 로버트는 그녀의 선택마저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아는 인물이라 긴 여운을 남긴다.



아름다운 무대 예술과 환상적인 선율의 음악은 화려함보다는 뭉근한 감동을 주는 작품의 결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소설의 원작자인 로버트 제임스 월러는 매디슨 카운티의 낡은 다리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영감을 얻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썼다. 그렇기에 뮤지컬 무대에서도 아날로그적인 배경과 공간의 무드를 살리는 게 핵심인데, 클래식함과 현대적인 감각이 적절하게 버무려져 관객들을 단숨에 1960년대 중서부 시골 마을로 안내했다. 앙상블들이 손수 소품과 세트를 이동시키는 가운데, 턴테이블·리프트·레일 등도 활용하며 전체적인 무대 전환에 지루함을 없앴다.

LED 패널을 이용한 영상은 연출의 핵심이다. 작열하는 아이오와의 벌판을 효과적으로 그려냈고, 특히 해가 뜨고 지는 색의 변화를 담아내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감정선을 유려하게 표현했다.

최고로 꼽히는 건 음악이다. 브로드웨이 최고의 작곡가 제이슨 로버트 브라운의 명곡이 매 장면 감성을 터치한다. 재즈·컨트리풍의 사운드에 젖어 들다가 이내 깊은 감성의 멜로디에 심장이 울렁거린다. 그랜드 피아노·바이올린·비올라·첼로·베이스·기타·퍼커션으로 구성된 10인조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귀를 타고 들어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기억된다.

물에 푼 물감이 순식간에 번져가듯, 서로의 인생에 스며든 프란체스카와 로버트. 빛바랜 사진이 아닌, 부드러운 수채화처럼 남은 3박 4일의 기억이라 더욱 잔상이 길게 남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다. 재연에 이어 또 한 번 호흡을 맞춘 박은태·차지연은 호소력 있는 연기와 노래로 매 순간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공연은 오는 7월 13일까지 서울 신사동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계속된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