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유리창 이론’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안 좋은 환경을 방치하면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도 부정적으로 변한다는 말이죠. 학교도 마찬가지예요. 환경이 바뀌면 아이들이 달라집니다.”권영기 서울 성동고 교장의 교육 철학이다. 한국교원대 1기 졸업생으로 교원대 출신 최초의 교사가 된 권 교장이 교직에 발을 들인 지 어느덧 34년. 1만 명이 넘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는 학생의 태도와 학습 동기는 물리적 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 그는 “학습 환경이 좋아지면 아이들 표정부터 달라진다”며 “더 밝아지고 수업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한다”고 설명했다.환경 개선에 90억 투입…“발로 뛰며 예산 확보”
이러한 교육철학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권 교장은 2022년 성동고에 부임한 후 도서관 리모델링에 착수했다.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을 벤치마킹한 성동고 도서관은 서울교육청 관할 최초의 복층구조 도서관이다. 개방감을 살리고 학습카페 분위기를 조성해 학생들이 더 자주 방문하도록 설계했다. 그는 “좋은 공간이 생기니까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더라”며 “이제는 학생들이 교내에서 가장 즐겨 찾는 공간이 됐다”고 말했다.
도서관 리모델링을 포함해 권 교장이 학교 환경 개선에 투자한 금액은 90억 원에 달한다. 직접 발로 뛰며 교육청·지방자치단체 예산과 공모사업으로 따낸 결과물이다. 권 교장이 교육계에서 ‘재정 감각과 추진력을 모두 갖춘 리더’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그는 학령인구 감소 시대에 ‘학생들에게서 선택받는 학교’가 되려면 공립학교도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권 교장은 “학교 환경 개선 사업은 단지 재학생의 학습 여건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라며 “장기적으로는 ‘예비 입학생들이 가고 싶어하는 학교’를 만드는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3월 입학한 신입생들의 학력평가 결과에서 상위권 학생 비율이 전년 대비 늘었다는 점을 언급하며 “좋은 환경이 우수한 학생을 불러오는 선순환이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학교 경쟁력 제고는 해외 명문대학과의 협력으로도 이어졌다. 성동고는 올해 하반기 미국 위스콘신대와 입학전형 관련 업무협약을 체결할 예정이다. 학교장 추천을 통해 위스콘신대에 지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권 교장은 “외고나 자사고가 아닌 일반고 중에서 이런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건 매우 드문 사례”라며 뿌듯함을 드러냈다.“은사 떠올리며 ‘1호답게’ 살아와”
교육현장 변화를 이끌어 온 권 교장의 원동력은 ‘1호 교사’로서의 책임감이다. 1989년 졸업과 동시에 문교부 장관에게서 받은 교원 자격증에는 ‘교원대 제1호’라는 번호가 찍혀있다. 그는 “수석이라 1호인 건 아니고 가나다순으로 받은 번호였다”며 “우연히 받은 1호 타이틀이지만 그 숫자가 주는 책임감은 생각보다 크더라”고 털어놨다. 이어 “1호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교직 생활 내내 늘 따라다녔다”고 전했다.
‘1호’ 타이틀의 무게가 유독 무겁게 느껴질 때면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만났던 담임 교사를 떠올린다. 배움이 느린 아이였던 권 교장이 교사의 길을 꿈꾸게 만든 은사다. 그는 “내성적이고 학습 성취도가 낮았던 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해준 선생님”이라며 “그 덕분에 성격도 밝아지고 수업이 즐겁다는 걸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이어 “사랑은 받아본 사람이 더 잘 줄 수 있다”며 “내가 받은 만큼 학생들에게 돌려주겠다고 다짐한다”고 했다.
최근 교권 추락과 함께 교대 기피 현상이 심화하고 있지만 권 교장은 “교사는 여전히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는 자랑스러운 직업”이라며 “누군가의 인생에서 ‘귀인’이 될 수 있다는 건 참 보람찬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교사의 전문성이 존중받고 사회적 대우가 뒷받침 되면 지금의 교권 위기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경 기자 capit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