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록의 ‘조용한’ 투자…ESG 자산은 팽창 중

입력 2025-05-03 06:00
수정 2025-05-03 14:53
[한경ESG] 커버 스토리 - ESG 자금, 혁신 산업에 몰린다 ②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2025년 연례 서한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와 기후 관련 표현을 전면 배제했다. 그는 전년도 서한에서 ‘에너지 실용주의’를 강조하며 원자력 확대와 규제 완화를 언급했지만, 올해는 관련 용어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 내 보수 진영의 반(反)ESG 정서와 정치적 공세를 고려한 전략적 후퇴로 풀이된다.

ESG 투자 확산을 이끌어온 상징적 인물인 래리 핑크의 이러한 행보로 인해 ESG 투자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하지만 블랙록의 실질적 투자 행보는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ESG라는 단어는 피하고 있지만, 자산 흐름은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혁신 산업에 더욱 집중되는 양상이다.

2024년 10월 블랙록은 글로벌 인프라 투자사 GIP(Global Infrastructure Partners)를 약 125억 달러(약 17조 원)에 인수했다. GIP는 재생에너지, 디지털 인프라, 수자원, 폐기물 등 다양한 지속가능 인프라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자산운용사로, ESG 원칙을 철저히 반영해 1700억 달러(약 242조 원) 규모 자산을 운용하고 있다.

GIP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거대한 해상풍력발전소 이미지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에너지 전환 및 지속가능성’ 섹션에는 “글로벌 에너지 전환을 촉진하는 GIP의 비전에 따라 세계 최고 수준의 재생에너지 자산 보유자이자 운영자가 되기를 지향한다”는 문구가 명시돼 있다.

블랙록, 탈탄소 인프라 투자 박차

GIP는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3월 4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최근 주력인 ‘GIP 펀드 V’는 목표액인 250억 달러를 조달하는 데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인프라 산업에서 가장 큰 펀드가 될 전망이다. GIP는 이를 바탕으로 에너지, 운송, 디지털 자산 등에 대한 투자를 이어가기로 했다. 이처럼 블랙록의 투자 전략은 겉으로는 침묵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ESG와 탈탄소 기술을 향해 조용히 이동하고 있다. GIP는 투자 초기부터 기후 리스크를 면밀히 분석하고, 투자 이후에는 ESG 성과를 정기적으로 평가하며 탄소감축 이행 계획을 수립한다.

전 세계적으로도 ESG 자금은 에너지 인프라 중심의 혁신 산업으로 이동 중이다. 단순한 ‘녹색 마케팅’ 차원을 넘어 실질적 기술 수요와 정책적 유인책이 결합되며 자본이 실익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ESG 테마 펀드가 가장 활발히 투자하는 분야는 태양광, 수소연료전지, 인공지능(AI) 반도체, 전기차, 차세대 소재 등으로 나타났다.

이들 산업은 탄소중립을 실현하는 데 필수 기술이자 미래 공급망의 주도권을 결정짓는 전략 산업으로 평가된다. 특히 AI 수요 급증과 맞물려 ESG 자금은 전력 인프라 최적화, 고효율 반도체, 저전력 냉각 시스템 등 고에너지 집약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예컨대 에머슨, 슈나이더처럼 에너지 효율화 솔루션 기업은 물론, AI 서버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이 투자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정책적 유인도 뚜렷하다. 유럽연합(EU)은 2023년부터 ‘그린딜 산업계’에 대해 연간 수십조 원 규모의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제공 중이다. 미국 역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청정기술 제조 기업에 대한 세액 공제를 확대하며 관련 투자 확대를 견인해왔다.

반ESG 기류 속에서도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IRA로 인한 일자리 혜택 등을 고려해 손쉽게 IRA를 폐기하지 못하고 있다. ‘ESG’라는 용어는 정치적 논란을 피해 뒤로 물러났지만 실질적인 자금 흐름은 여전히 기후 기술과 녹색 혁신으로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 ESG 자금은 단순한 환경 관련 테마를 넘어 ‘국가 전략산업’ 및 ‘경제 안보’ 이슈와 긴밀히 연동되고 있다. 반도체, 2차전지, 친환경 소재 등은 녹색 전환과 공급망 안정이라는 목표를 모두 충족하는 핵심 산업 분야다. 이에 따라 ESG 투자는 점차 기술 독립과 산업 경쟁력 확보라는 국가적 의제와도 연결되고 있다.

산업별 특화 규제, ESG 투자 가속화

ESG 자금 흐름을 가속화하는 또 다른 요인은 산업별 특화 규제다. EU는 2030년까지 항공연료의 6%를 지속가능항공유(SAF)로 대체하는 것을 의무화했으며, 해운 분야에서도 국제해사기구(IMO)가 2027년부터 세계 최초로 선박 탄소세를 도입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SAF, e-연료, 메탄올 기반 청정 연료 기술 등이 ESG 투자에서 주목받고 있다.

ESG 자본도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다. 블룸버그NEF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저탄소에너지 전환 투자는 처음으로 2조1000억 달러를 돌파하며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재생에너지, 전력망 구축, 전기차 및 배터리가 성장을 주도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4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700GW 규모의 재생에너지 발전 용량이 새롭게 추가돼 22년 연속 증가세를 이어갔다고 밝혔다.

기업도 움직이고 있다. BMW는 2024년 EU 녹색분류체계(EU 택소노미) 기준에 따라 자본 지출의 99.8%를 친환경 활동에 배분했다. 반도체 장비 제조사인 ASML은 ESG 적합 지출 비중을 전년 대비 2배 가까이 확대해 86%를 기록했다. 에어버스는 SAF와 탄소감축 기술에 전체 투자금의 80%를 집중하며 항공산업의 탈탄소화를 선도하고 있다.

국내도 예외는 아니다. 현대자동차그룹과 포스코그룹은 미국 루이지애나에 약 8조 원 규모의 친환경 제철소 건립을 추진 중이다. 직접환원철(DRI) 기반 전기로 방식을 도입해 탄소배출을 최소화하면서 고급 자동차 강판을 생산한다는 전략이다. 양사는 2차전지 소재 협력에도 나서 글로벌 공급망을 강화하고 있다.

2024년에는 금리 상승과 미국 내 반ESG 기조로 인해 일시적 자금 위축이 있었지만, 기후 기술과 실물경제 기반의 ESG 투자는 여전히 구조적 성장세에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찰스 프렌치 임팩스 자산운용 공동 CIO는 “기술 주도 혁신은 이제 막 시작 단계”라며 “기업들이 비용 절감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 기후 기술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승균 한경ESG 기자 cs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