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젤의 '나쁜 남자'로 완벽 데뷔한 발레리노 전민철

입력 2025-04-20 09:57
수정 2025-04-21 10:08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막을 올린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 2막 중 윌리(처녀귀신)들 앞에서 알브레히트가 지젤과 함께 윌리의 여왕 '미르타'에게 빈다. 미르타는 냉담한 표정으로 알브레히트에게 죽음을 고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골처녀 지젤과 어울렸던 지난날(1막)을 후회하는 알브레히트. 혼령이 된 지젤을 보며 죄책감이 밀려든 표정을 짓다가 죽기 직전까지 용수철처럼 뛰어오른다. 무용수로서는 극한까지 자신을 밀어부치는 시간이자 관객에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다.



발레리노 전민철(21)이 이 무대의 알브레히트로 처음 데뷔했다. 그가 '앙트르샤'(점프하며 공중에서 발을 빠르게 교차하는 동작)를 25번이나 해내자 객석은 홈런을 만난 야구장처럼 함성이 쏟아졌다. 전민철은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높이로 계속 뛰어올랐고, 음악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음악성과 연기력까지 보여줬다. 수많은 갈라 공연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장면인데 중력의 힘을 고스란히 받는 이 수직 점프를 도파민 넘치게 소화하는 발레리노는 많지 않다. 지난날 전민철이 섰던 공연을 숨가쁘게 좇으면서, 테크닉을 논하는 건 무의미해진 지 오래였지만 이 날의 점프는 경이로웠다.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에 입단하는 발레리노 전민철이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주역은 '지젤'의 알브레히트였다. 지난 2월 말, 유니버설발레단이 객원무용수로 그를 깜짝 캐스팅했을 때, 소감을 묻자 "지젤이란 작품을 너무나 사랑하니까, 안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신드롬급 인기에 쉴새 없이 무대에 오른 데다 예술요원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그에게 전막은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 우려했지만 기우였다.

전민철의 상대로 지젤을 연기한 발레리나 홍향기(36)는 수석 무용수다운 노련함과 예술성으로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는 타이틀롤이자 아돌프 아당(지젤의 작곡가)의 아름다운 음악 그 자체가 됐다.



무대가 악보라면 홍향기는 악기였다. 온 몸으로 지젤의 희노애락을 연주했다. 1막에서 알브레히트의 신분이 발각되고 그에게 약혼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정신을 놓는 장면(매드씬)은 강렬했다. 광란으로 우당탕탕 무대를 뛰어다니던 장면과 반대로 2막에서는 분위기를 완전히 전환한다. 1g의 무게감도 느껴지지 않는 혼령으로 변신한 지젤은 미르타에게 배신남을 살려달라고 두손을 모은다. 신성하고 강인했던 옆 얼굴. 홍향기가 지젤이라는 캐릭터에 완벽히 몰입해 춤과 마임, 표정을 빈틈없이 챙긴 결과였다.

두 주역의 호연을 더욱 빛나게 만든 것은 윌리들의 군무였다. 저승의 아가씨들을 그려내기 위한 단원들의 피나는 노력 덕분에 비현실의 세계가 2막 내내 그대로 객석에 전이됐다. 이들이 새털같은 움직임으로 칼군무를 이룰 때 변주와 같은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움직임은 더욱 애잔한 울림을 주었다.



유니버설발레단의 <지젤>은 연출과 안무 부분에서도 약간의 변화를 주면서 잔 재미도 줬다. 묘지 비석이 180도로 휙 돌면서 지젤이 윌리가 돼 등장하거나, 백합을 들고 지젤의 무덤을 찾아온 알브레히트 앞에 어느 윌리가 백합을 뿌려주며 그 꽃말(용서)을 되새기게 만든다. 지젤의 친구들이 1막에 추는 패전트 파드되(2인무)는 유니버설발레단이 재해석한 패전트 파드시스(6인무)로 변형됐다. 농가의 활기찬 기운이 6인무에서 보다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공연은 27일까지.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