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짝 엎드리고 있죠. 고개 들면 찍힐 수 있으니까.”(미국 워싱턴DC 로펌 소속 변호사 A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신과 반대편에 있는 대형 법률 회사(로펌)를 겨냥해 제재하는 행정조치(행정명령)를 잇달아 내면서 미국 로펌들이 ‘트럼프판 문화 전쟁’의 한복판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좌파 몰아내기’ 문화 전쟁
과거 자신을 수사한 인사들에 대한 보복을 공언한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폴와이스 등 대형 로펌을 제재하는 행정조치를 줄줄이 발표했다. 2016년 대선 때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캠프를 대리한 퍼킨스코이, 트럼프와 러시아의 유착 의혹인 ‘러시아 스캔들’을 조사한 특검팀 소속 검사를 고용한 윌머헤일과 제너&블록 등이 주요 타깃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들이 법적 절차를 “무기화”했으며 “미국의 이익을 훼손하고 다양성 조치로 인종 차별적 결정을 했다”고 주장한다.
보복 방식은 상당히 치밀하고 구체적이다. 해당 로펌의 연방정부 계약을 재검토해서 끊고, 정부 건물 출입을 금지하고, 공무원들과 만날 수 없게 하는 식이다. 법률 시스템 남용을 막겠다며 모든 로펌을 대상으로 “국가 안보, 공공 안전, 선거 청렴성을 위협하는 행위를 제한”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밥줄이 끊길 위기에 처한 로펌은 줄줄이 ‘백기 투항’을 선언하고 있다. 1000명가량의 변호사를 둔 폴와이스는 백악관과 협상 끝에 반유대주의 퇴치 등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의제를 지원하는 데 4000만달러 상당의 무료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합의하고 행정조치 철회를 얻어냈다.
아직 행정조치를 받지 않은 로펌 중엔 트럼프 행정부와 ‘선제적 합의’에 나선 곳도 있다. 변호사 1700여 명이 일하고 있는 스캐든압스슬레이트미거&플롬은 1억달러 규모의 법률서비스 제공을 약속해 트럼프 행정부와의 갈등을 예방했다. 스캐든압스는 트럼프가 패한 2020년 대선에 대해 부정선거론을 제기한 인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4000명의 변호사를 거느린 초대형 로펌 커클랜드&엘리스는 제프리 로즌 전 법무부 차관 등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주요 고위 관료를 여럿 배출했지만, 소수자 등에 대한 다양성 우대 조치를 했다는 이유로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을 받고 있다. 이 회사는 행정명령을 피하기 위해 로비스트를 고용하고 별도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도했다.◇500개 로펌 연판장 제출법조계에선 “고객을 가려 받으라는 말이냐”는 불만이 들끓고 있다. 자의적 잣대로 트럼프 행정부가 과도한 조치를 내리는 일은 위헌적이라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조치를 한 로펌 중 퍼킨스코이, 제너&블록, 윌머헤일 등 세 곳은 트럼프 행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법원에서 이를 받아들여 일단 행정조치 집행은 상당 부분 중단된 상태다. 트럼프 대통령은 담당 판사들을 겨냥해 “부패했다”고 저격하는 등 반발하고 있다.
특히 퍼킨스코이가 낸 소송에는 500곳에 달하는 로펌이 지난 4일 “이 소송 결과에 우리도 영향을 받는다”는 취지의 서명을 제출했다. 이 사건은 퍼킨스코이만의 문제가 아닌 만큼 판사에게 전향적으로 판단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종의 연판장이다. 퍼킨스코이는 1000여 명의 변호사를 두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에 소송을 거는 등 공개적으로 반발하는 로펌은 여전히 소수다. 대부분 로펌은 현 상황을 우려하면서도 최대한 몸을 사리고 있다. A 변호사는 기자에게 “고객을 가리지 않아야 하고 수수료만 준다면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로펌의 본성인데 현재는 아무래도 눈치를 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른 로펌 소속 B 변호사는 “트럼프 행정부에 대항하는 로펌 명단이 엑셀 파일 형태로 돌아다니고 있다”며 “미국에서는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하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고 했다.
현지 변호사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이런 움직임이 수년 전부터 준비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B 변호사는 “트럼프 대통령은 대학과 로펌을 젊은이에게 진보 사상을 주입하고 이런 논리를 사회에 전파하는 주요 경로로 보고 있다”며 “두 영역에 조치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꾸준히 있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즉시 실행에 나선 것”이라고 해석했다.
컬럼비아대 등 주요 대학에 연방정부 자금 지원을 묶는 방식으로 ‘항복 선언’을 받아낸 트럼프 대통령이 로펌을 대상으로 벌이는 전쟁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미래의 정치적 토양을 결정하기 위한 문화 전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