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판 사나이' 하형주 "스포츠 통한 국민행복, 한판승부 내겠다" [조수영의 오 마이 스포츠 히어로]

입력 2025-03-25 08:00


지난해 11월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취임식, 단상에 오르던 하형주(62) 이사장은 40년 전 미국 LA올림픽 유도 95kg급 결승전을 위해 매트로 향하던 순간을 떠올렸다고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호흡을 조절하며 매트로 다가가던 그의 머릿 속에는 지나온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당시 올림픽을 준비해온 모든 과정이 떠올랐습니다. 준비가 선하고 판단을 옳게 했다면 반드시 결과는 좋게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믿었지요."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 유도 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 체육 재정의 98%를 책임지는 '젖줄'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수장으로 나서며 그때를 떠올린 것도 그래서다. 최근 한국경제신문과 만난 하 이사장은 "1981년 바덴바덴 선언부터 1988년 서울올림픽을 관통하는 삶을 살아온 저에게 있어 서울올림픽의 유산을 계승하는 국민체육진흥공단은 숙명과도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 40년간 체육인이자 교수, 행정가로서 사명감을 갖고 일해온 저의 모든 경험을 쏟아 부어 국민의 건강한 삶을 위한 '한판 승부'를 만들어내겠다"고 밝혔다.

◆"어무이 내 보이나?" 외치던 올림픽 영웅
하 이사장은 대한민국의 올림픽 영웅 1세대다. 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되고 국민들의 기대감이 한껏 달아오르던 1984년 LA올림픽, 예선부터 세계 강호를 줄줄이 꺾었고 시원한 승부로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 유도가 헤비급(95kg 이상)에서 따낸 첫 금메달이었다. 금메달 확정 직후 "어무이, 내 보이나? 이제 고생 끝났심더"라던 그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진한 감동과 자신감을 안겼다.



그는 체육인으로서 다채로운 경로를 개척해온 선구자이기도 하다. 동아대 체육학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썼고, 부산광역시 시의원을 지내며 행정가의 길도 걸었다. 스포츠인으로서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개척해온 그는 "체육인으로서 저 자신에게,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고독하게 싸워왔다"고 돌아봤다. "선수생활 좌우명이 '매사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타이밍이 왔는데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거나 놓칠 수 있습니다. 게으름, 유혹에 흔들리거나 나 자신과의 약속을 놓치지 않기 위해 처절할 정도로 고독하게 저 자신과 싸웠죠." 이같은 공로를 평가받아 지난해 말에는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에도 헌액됐다.

이제 취임 넉달째, 하 이사장은 "숨돌릴 틈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공단의 결정 하나하나가 한국 체육과 국민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다.

공단은 1988년 서울올림픽의 잉여금 3521억을 바탕으로 1989년 문을 열었다. 대한체육회, 대한장애인체육회와 나란히 한국 3대 체육단체로 꼽힌다. 특히 스포츠토토 사업을 통해 한국 체육 재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설립 이래 매년 조성한 체육진흥기금 누적액은 19조원을 넘어섰고 올해는 체육진흥기금 사업비 1조6153억원 중 체육 분야 보조금으로 총 1조3215억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한국 스포츠 재정의 98%를 담당하고 있는 '젖줄'인 셈이다.

그에게 국민체육진흥공단 수장은 갑작스런 미션이 아니다. 이사장 취임 전까지 그는 1년 4개월간 공단의 상임감사를 지냈다. 그는 "덕분에 업무공백은 없지만 결정권자가 되어보니 책임감과 부담감이 20배는 더해진 것 같다"고 웃었다.

조직에 대한 애정도 한층 더 깊어졌다. 이사장 취임 직후부터 그는 차장급 직원들과 매주 미팅을 가지고 있다. 조직의 허리를 맡고 있는 인재들과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존재 의의를 공유하고 주인의식을 가져달라고 당부하기 위해서란다. 그는 “공단 내부에도 서울올림픽(1988년) 이후 태어난 직원이 많아져 서울올림픽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가 와닿지 않을 수 있다”며 “공단이 자리하고 있는 올림픽공원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모두 서울올림픽의 유산이다. 저 뿐만 아니라 직원 모두가 서울올림픽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정확히 인지해야 공단의 사업을 소중하게 이끌어갈 수 있다”고 했다.



◆취임 첫날부터 국회행… 스포츠토토 공영화 이끌어내
하 이사장의 과감한 추진력은 벌써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체육진흥투표권(스포츠토토) 사업의 공영화 전환을 위한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이다.

스포츠토토 발행 사업은 2001년부터 민간에 위탁 시행돼왔다. 이 과정에서 과도한 입찰 경쟁으로 인한 저가 낙찰, 그에 따른 운용 예산과 인력 축소, 전문성 저하의 악순환이 이어진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때문에 공단은 공영화를 통해 안정적인 사업운영에 집중하고, 전문성 강화, 신규상품 개발 등 지속적인 사업혁신을 추진하는 것을 최대 과제로 꼽아왔다.

하 이사장은 취임 첫날부터 국회를 찾아 기금 안정화 방안을 설명하는 등 관계기관을 직접 찾아다니며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 결과 오는 7월 1일부터 체육진흥투표권 발행 사업을 공단이 별도로 설립한 자회사에서 시행할 수 있게 됐다. 하 이사장은 “체육진흥투표권 공영화는 공단의 오랜 염원이자, 최우선 과제였다”며 “공공성, 전문성, 안정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공단의 또다른 역할 중 하나가 엘리트 체육 지원, 그리고 스포츠 산업에 대한 마중물 역할이다. 하 이사장은 두 분야가 맞물려 성장하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은 5000달러 수준이었습니다. 지금은 3만8000달러죠. 경제발전을 이룩했던 아버지 세대가 피나는 노력을 해주신 결과 서울올림픽을 위해 성장발판을 마련했다면, 지금은 윤택해진 상황에 맞게 삶의 질을 높이고 가치를 만들어주는 스포츠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산업이 함께 발전해야하지요." 엘리트 선수들이 프로 스포츠, 국제대회 등을 통해 만들어내는 결과가 스포츠 시장을 키우는 마중물 역할을 하고, 이를 통해 스포츠 산업은 후대 엘리트 체육인을 양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부상 걱정없이 운동할 수 있도록" 스포츠 전문 재활 병원 추진

그가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과제로 '스포츠 전문 재활 병원 설립'을 꼽은 것도 그래서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위기 중 하나인 인구 감소는 엘리트 체육에도 큰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 이사장은 "인재 하나하나가 소중한 시대이기에 각각의 선수가 자신의 능력을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엘리트 스포츠에서는 중고등학교 시절 불의의 부상으로 인한 은퇴가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선수들이 꽃도 피워보기 전에 부상때문에 꿈을 접고, 그로 인해 가족까지 모두 불행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꿈을 펼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막으로서 부상을 예방하고 방지하는 재활 전문 병원이 필요합니다."

스포츠 재활은 아주 섬세한 신경계 미세근육 하나하나를 다루기에 의학에서도 아주 특수한 분야다. 하 이사장은 "엘리트 선수들이 점점 줄어드는데 부모님들이 안심하고 자녀들을 체육인으로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며 “소방·경찰 전문 병원같이 체육인이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 설립을 위해 정부와 협력해 해결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하 이사장은 이제 취임 이후 첫번째 시험대에 오른다. 오는 27일부터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나흘간 열리는 '2025 서울국제스포츠레저산업전(스포엑스·SPOEX)'이 무대다. 올해로 25년째를 맞는 아시아 최대 스포츠산업 전시다.

이번에는 '더 넓고 다양한 측면의 K-스포츠산업 콘텐츠'를 주제로, 국내외 스포츠 기업의 최첨단 기술을 비롯해 스포츠 기업.단체의 채용 박람회, 투자상담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하 이사장은 "스포츠 기업과 학계, 프로스포츠협회와의 협업으로 미래 세대들이 더 큰 꿈을 꾸고 도전하는 기회의 장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