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한반도의 끝자락, 남해 작은 마을. 태어날 때부터 어부의 삶을 살았던 곰치의 꿈은 '만선'이다. 이상 수온으로 근해에선 물고기 씨가 마르고, 원양어선과 대규모 어업이 출현하던 시기, 전통적인 어업 방식을 고수하던 어민들의 시름이 깊어지던 때이자 객주들의 횡포도 극의 달했던 상황에서 곰치는 풍랑 속에 뛰어든 어촌만의 파국을 상징한다.
'만선'은 희극의 대가로 불리는 천승세 작가가 작품이다. 천 작가는 '만선'으로 제1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현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했다. 기울어진 갑판처럼 기울어진 계급 관계가 민중의 언어, 상징적이지만 유려한 이야기 구성으로 펼쳐진다.
바라는 건 만선뿐이었던 순박한 어부 곰치는 평생 배를 타고 일밖에 모르고 살았다. "그물을 손에서 놓는 날에는 차라리 배를 갈르고 말 것이여"라고 말할 정도로 만선만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미련하게 보일 정도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만선으로 돌아왔어도 잡아들인 부서(보구치)는 모두 빚으로 넘어간다. 그의 배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선주는 남은 빚까지 갚지 않으면 절대로 배를 내어줄 수 없다고 '갑질'을 한다.
가난과 불안에 지친 아내 구포댁이 "어부 일을 그만두자"고 제안하며, 곰치를 설득하지만, 그는 아들과 함께 다시 한번 거친 바다로 나가고, 파도와 함께 불행이 곰치 가족을 덮친다.
1964년 처음 세상에 나온 '만선'은 환갑을 넘긴 작품이지만 진한 울림과 강렬한 메시지는 여전하다. 2020년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으로 각색돼 다시 무대에 올려졌는데 이 과정에서 구포댁, 곰치와 그의 딸인 슬슬이 등 주요 여성 캐릭터들이 주체성을 지닌 인물로 각색돼 극의 몰입도를 높인 덕분이다.
아들 셋을 바다에 잃은 후 '흑화'되는 구포댁의 모습은 원작보다 주체적이고 도전적인 모습으로 선보여지고 있다. 심재찬 연출은 "구포댁이 바뀌지 않으면 이 작품은 달라질 수 없었다"며 "운명에 순응하는 여인처럼 보이지 않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언젠가 가장 어린아이마저 물에서 죽을 운명이라는 공포에 휩싸인 후 광기에 점령당한 구포댁은 전통적인 모성애와 한의 정서를 보여주는 동시에 기존의 질서 속에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어 극단으로 치닫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다.
슬슬이 역시 미래를 약속한 사랑하는 사람을 바다에 잃고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객주의 횡포에 휘말리지 않고 맞서는 슬슬이는 단순히 한 집안의 자산이 아닌, 극의 갈등을 고조시키는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묘사된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모두 매우 비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는 인물들이다. 이들에게 현실은 비극적인 절망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어떻게든 나아가려 한다는 점에서 삶의 순환고리를 보여준다.
갑판을 형상화한 기울어진 무대에서 파도와 바람 소리가 어우러진 가운데 배우 김명수가 곰치, 정경순이 곰치댁을 맡으며 극을 이끌었다. 중장년 원로 배우들의 단단한 연기와 쩌렁쩌렁한 발성이 110분간 극을 가득 채운다.
특히 후반부에 무대를 가득 적시는 폭풍우가 하이라이트다. 실제로 쏟아지는 5톤 분량의 물줄기가 곰치와 구포댁 뿐 아니라 관객들까지 우울함에 적신다. 오는 30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된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