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패션업계의 대표 키워드는 양극화다. 명품은 견고한 수요를 바탕으로 시장을 주도하며 가격 인상에도 과감하다. 반면 대부분의 패션 브랜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 와중에 급성장하는 건 ‘가성비 의류 시장’이다. SPA(제조·직매형 의류)들이다.
가성비 트렌드는 고물가 기조가 이어지면서 재작년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올 들어선 패션업계의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주머니 사정이 녹록치 않으니, 옷값부터 아끼고 있단 얘기다. 가격은 저렴하지만 고가 브랜드에 버금가는 품질을 가진 대안 제품을 찾는 ‘듀프(Dupe)족’이 2030세대의 소비 트렌드로 자리잡았다.SPA 가성비 전쟁SPA 브랜드는 지난해 승승장구했고, 올해도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유니클로는 6년 만에 1조원 매출을 회복했다. 토종 SPA 브랜드 탑텐은 9700억원대 매출을 냈다. 삼성물산의 ‘에잇세컨즈’도 매출이 3000억원대였다. 이랜드의 스파오는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25% 늘어난 6000억원에 달했다. 무신사 스탠다드의 작년 1∼10월 오프라인 매출은 재작년 동기 대비 3.5배로 늘었다.
가성비 하면 빠질 수 없는 다이소에서도 ‘5000원’ 의류 제품이 각광받고 있다. 다이소에 따르면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겨울 의류 판매액은 전년 동기 대비 86% 늘었다. 일반적인 SPA 브랜드보다 저렴한 가격을 찾는 소비층이 적극 움직인 결과다. 다이소는 겨울 의류 수요가 있음을 확인하고, 올해는 제품군을 넓혔다. 맨투맨, 후드티 신상품 등 총 60개로 제품군을 확대했다. 디자인을 단순화하고 마케팅 비용을 줄여 5000원이지만 퀄리티가 양호한 제품을 내놓은 게 시장에서 통했다
2만원대 청바지로 최근 뜨고 있는 NC베이직도 가성비 패션 시장이 커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2023년 론칭한 NC베이직은 이랜드 리테일이 운영하는 SPA 브랜드다. 가성비 패션의 대명사로 자리잡고 있다. 지난 1일 서울 송파구 NC송파점 1층에 첫 대형 모델 매장을 리뉴얼 오픈했다. 소형 매장으로 수요가 있음을 확인한 이랜드리테일이 본격적인 ‘가성비 패션’의 시장을 키우기 시작했단 뜻이다. 티셔츠 9900원, 청바지 1만9900원, 셔츠 1만9900원 등 NC베이직은 전체 상품 중 약 80% 규모를 3만원대 이하로 구성했다.
이랜드는 스파오와 NC베이직을 내세워 가성비 패션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의류 시장 불황은 SPA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다양한 코디가 가능한 티셔츠나 청바지 등 기본 패션 품목이 높은 매출을 기록할 것”이라고 설명했다.기본 디자인이 각광실제 소비자들도 범용성이 높은 제품을 집중적으로 구매하고 있다. 카카오스타일이 운영하는 스타일 커머스 플랫폼 ‘지그재그’에 따르면 2월 4일부터 2월 24일까지 3주간 슬랙스 거래액이 전년 동기 대비 388% 증가했다. 화이트 셔츠 거래액도 248% 늘었다. H라인스커트(183%), 재킷(164%), 정장구두(137%) 등도 2배 이상 늘었다. 직장인이나 학생들이 입을 수 있는 ‘기본 패션 아이템’이 대부분이다. 특히 3만~7만원대면서 소재가 좋고 디자인이 무난한 제품들이 잘 팔린다는 게 플랫폼 측 설명이다.
카카오스타일 관계자는 “경기불황으로 소비심리가 위축되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고가의 제품을 구매했던 하객룩, 면접룩 역시 가격대와 실용적인 디자인을 두루 갖춘 가성비 상품이 인기를 얻고 있다”며 “이러한 절약형, 합리적 소비 패턴은 앞으로도 보다 다양한 상품, 다양한 카테고리에 걸쳐 지속적으로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고윤상 기자 k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