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툴러도 괜찮아, 중요한 건 마음을 열 용기

입력 2025-03-11 17:14
수정 2025-03-12 00:19

“난 사실 결혼이 너무 하고 싶어요. 그놈의 웨딩드레스가 너무 입고 싶어요. 사진 왕창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다 올리고 싶어요. 20장 꽉꽉 채워서 마지막 한 장까지 전부 다!”

사랑을 갈망하며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여자가 식탁 위로 벌떡 올라가 외친다. 울먹이는 여자 옆에는 오늘 처음 본 남자가 있다.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당신한테 해줄 게 없다”며 거리를 두는 남자. 둘은 이대로 서로를 지나칠까. 아니면 마음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

영국 런던이 배경인 연극 ‘비기닝’(사진)은 파티에서 처음 만난 낯선 남녀가 하룻밤 사이에 주고받는 솔직하고 진득한 대화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사랑을 시작할 때의 설레면서도 묘하게 어색한 상황이 2인극으로 현실감 있게 전개된다. 비기닝이 국내 무대에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능력 있는 사업가 로라의 아파트에서 왁자지껄한 홈파티가 끝나고 부엌에는 이날 지인의 친구로 초대된 대니만 남았다. 로라는 이날 처음 만난 대니에게 “집에 안 가길 바랐다”며 솔직하게 호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대니의 반응은 어째 뜨뜻미지근하다. 당황한 듯 몸을 뒤로 빼고, 갑자기 고무장갑을 끼더니 집주인도 아닌데 설거지를 시작한다. 대화 도중 어색해지는 순간이 오면 집에 가겠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떠나지는 않는다. 로라는 그런 대니가 답답하면서도 귀엽게 느껴진다.

로라는 서툴지만 매력적인 대니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하지만 알고 보니 그에게는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못하게 된 사연이 있었다. 대니가 로라에게 선을 긋는 것은 지난 상처가 불러온 두려움 때문이었다. 로라는 자신도 완벽하지 않고, 과거보다 중요한 건 지금이라고 위로한다. 그렇게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밀도 있는 대화가 지루할 틈 없이 흐른다. 둘의 대화에는 영국인이 사랑하는 축구, 정치적 이슈 등도 언급되지만 이질감 없이 느껴진다.

한 사람을 향한 호감은 두근거림과 함께 시작되지만 두려움도 동반된다. 비기닝은 이런 망설임과 두려움을 넘어 마음을 열 용기를 가질 때 비로소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비기닝은 2017년 영국 내셔널시어터 공연 당시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영국 유명 극작가 데이비드 엘드리지가 사랑과 관계를 주제로 만든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이다. 대니와 로라 역은 배우 이종혁과 유선, 윤현민과 김윤지가 각각 쌍을 이뤄 연기한다. 오는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