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규제 벽에 막힌 韓 반도체 공장

입력 2025-03-06 17:39
수정 2025-03-07 00:28
정치·사회적 혼란이 지속되면서 정부는 혁신적인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으며, 국정 운영에 대한 국민 신뢰도 역시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나라가 아무리 어수선하더라도, 미래 먹거리인 반도체산업을 살리기 위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뒷전으로 미룰 수는 없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20년 10월 개정된 건축법과 소방 규정으로, 이는 반도체 공장 현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우선 방화구획 이슈부터 보자. 건축법 시행령 제46조는 2020년 10월 개정 이후 바닥을 관통하는 모든 배관에 무조건 내화구조(콘크리트 등) 방화구획을 설치하도록 규제가 강화됐다. 화재 시 층과 층 사이로 불길이 번지지 않게 막겠다는 취지는 옳다. 하지만 반도체 공장에는 수직 배관이 워낙 많고 거대해서 상식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 많다. 예를 들어 가스·화학물질·공조 배관이 한곳에 모인 덕트샤프트라는 구역은 바닥면적의 50% 이상 혹은 90%까지 관통부로 뚫려 있다고 한다. 남은 부분을 콘크리트로 막아 봤자 실질적인 화재 차단 효용이 떨어진다. 당연히 구획 공사비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게다가 수만 개의 콘크리트 구멍을 일일이 뚫고 내화충진재로 밀봉해야 하는데 시간도 많이 소요된다. 이렇게 공기가 한두 개월만 늘어나도 수조원대 매출이 날아간다.

두 번째는 소방관 진입창 이슈다. 현재 규칙(‘건축물의 피난·방화구조 등의 기준에 관한 규칙’ 제18조의2)에 따르면 일반 건물 11층, 즉 약 33m 높이 범위를 기준으로 모든 층에 소방관 진입창을 설치해야 한다. 수평 측면에서도 40m마다 하나씩 둬야 한다. 소방사다리차가 닿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도체 공장의 층고는 한 층이 일반 건물 여러 층 높이와 맞먹는다. 예컨대 9층이 이미 50m를 훌쩍 넘는 건물에 “11층 이하니까 창을 달라”고 한다. 사다리차가 닿지 못하는데 진입창이 왜 필요한가? 한편 ‘무창(無窓) 운영’이 사실상 필수인 구역도 많다. 가스탱크 위험물을 다루는 구역, 외부공기정화 및 조절설비처럼 외벽 기계가 밀착된 구역, 클린룸처럼 온도·먼지·압력을 극도로 관리해야 하는 구역이 그렇다.

화재를 막겠다는 규제가 산업현장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실질적 안전효과는 낮고 낭비만 큰 규제’가 될 수 있다. 반도체처럼 국가 경쟁력의 최전선을 책임지는 핵심 산업에서 불필요한 설비·공사 비용이 폭증하면, 연구·개발·안전 투자에 쓸 자원을 빼앗아 가는 역설이 벌어진다. 도대체 누가 한국에 공장을 짓겠는가?

기업들은 “규제를 완전히 풀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방화댐퍼·고감도 감지기·소화설비 등 화재 안전 대책을 보완하고 추가로 갖추겠다는 입장이다. 정부의 안전 취지를 유지하면서, 모든 배관을 층 간 콘크리트 방화구획으로 무분별하게 막지 않아도 동등 이상의 방화·차단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소방관 진입창 위치와 개수도 소방 작전과 유기적으로 연계된 설계 및 종합적인 방화 계획을 통해 보다 효과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방안이 안전성을 입증받는다면, 규제를 보다 유연하게 적용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위험물 다량 취급 설비에 대해 ‘퍼포먼스 코드’(성능 기반 설계) 방식을 적극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즉, ‘건물 전체를 콘크리트로 막는’ 획일적인 규제 대신 산업시설의 특성에 맞춘 방화 설계와 인증 절차를 통해 안전성을 충분히 확보한다면 규제를 개선해주는 방식이다. 이것이야말로 국가가 할 수 있는 혁신이다.

국정이 혼란스럽더라도, 촌각을 다투며 첨단 공장 건설과 투자를 추진하는 기업들의 현실을 외면해서는 곤란하다. 특히 그 투자가 국가의 전략적 위상과 미래 먹거리로 직결되는 첨단 산업을 대상으로 한다면 더욱 그렇다. 안전 규제는 철저하게 정비하되, 산업 생태계 또한 보호해야 한다. 현장의 목소리를 더욱 세심하게 듣고, 혁신적이면서도 효과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다. 기업이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도록 규제의 틀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행정 절차도 신속하고 투명하게 운영해야 한다. 높은 자리에서 팔짱만 끼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기업을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