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 보면 기로에 설 때가 있다. 기로(岐路). 갈림길을 말한다. 이리로 갈지 저리로 갈지 선택할 기회를 말한다. 기로는 주로 인생의 활동이 활발한 시기, 선택의 가능성이 아주 많이 열린 젊은 시기에 자주 생긴다. 나같이 80 나이에 이른 사람에게 기로란 말은 당치 않은 말이다. 그러나 나는 올해 2025년을 나의 기로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로 나의 일들이 변하게 되어 있다.
첫째는 풀꽃문학관의 새로운 건립과 개관이다. 풀꽃문학관은 2014년 내가 공주문화원장으로 일하던 때 공주시의 도움으로 일본 가옥, 그러니까 적산가옥 한 채를 복원해서 연 간이 형식의 문학관이다. 그렇게 문을 열어 운영한 문학관을 10년 만에 새로운 건물을 신축해 다시 개관하는 해가 올해인 것이다. 더구나 문학관 이름까지 나태주풀꽃문학관으로 바꾸었다.
시는 '세상에 보내는 러브레터'
그리고 올해는 나의 시집 전집과 산문집 전집이 나오는 해이다. 시 전집이 아니고 시집 전집이고 산문 전집이 아니고 산문집 전집이다. 무슨 말인가. 그동안 나온 나의 시집과 산문집을 한군데 모아서 그대로 내는 책이란 말이다. 분량이 방대하다. 시집 전집 7000여 페이지에 산문집 전집 5000여 페이지. 그렇게 도합 1만2000여 페이지다.
그뿐 아니라 내 생애에 의미 있는 사진들을 모아서 사진집까지 500페이지 분량으로 준비하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해에는 이어령 교수와의 대담집 <마지막 수업>으로 주목받은 김지수 기자와의 대담집인 <나태주의 행복 수업>이란 책이 나오기도 했다. 약간은 두렵고 조심스럽다고나 할까. 어리둥절하다고나 할까.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을 가늠해 보게 한다.
사실 내 삶의 방향이나 목표는 단순 명쾌하다. 이대로 지속적으로 살면서 내리막길을 잘 정리하며 살면 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정리하고 남길 것은 남기고 없앨 것은 없애는 일이 중요하다.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주어진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나 자신에게 감사한다.
교직에서 물러나면서 나는 스스로 결심한 내용이 있다. 적어도 노인정이나 동창회나 삼락회에는 가지 않겠노라고. 그 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시와 문학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이다. 원로나 노인만 모이는 장소는 될수록 가까이 가지 않겠다는 것이 내가 지향하는 바이다. 대신 젊은 계층 사람들, 중등학교 학생, 대학생과 가까이 만나고자 한다. 그들이 불렀을 때 마다하지 않고 가야 한다. 불특정 다수 미지의 독자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며 그들과 마음을 열고 솔직한 심정으로 소통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진정으로 좋은 시인의 길이다. 나 자신이 시를 ‘세상에 보내는 러브레터’라 말하고 시인을 ‘세상을 위한 서비스맨’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지치고 힘든 사람 일으켜 세워야
요즘 사람들 사는 일이 고달프다고 입을 모은다. 몸이 고달픈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렇다고 한다. 몸이 먼저 앞으로 나가 버렸다고 한다. 어쩌겠나. 먼저 나간 몸이 잠시 멈춰 서서 뒤따라오는 마음을 기다려줘야 한단다.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문학이 어떻게 해야만 하나? 모른 척 눈감아야 할 것인가. 무시하고 멸시하고 깔보아야 할 것인가. 독야청청 자기만 잘났다고 자랑만 여전히 늘어놓을 것인가.
아니다. 문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문학은 동시대인과의 호흡이고 소통이고 동행이고 마땅히 그들을 위한 위로와 축복이고 공감이어야 한다. 지친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힘든 사람을 살려내야 한다. 이것이 문학의 지상명령이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문학은 문학이 아니다. 설 자리를 잃는다. 진정으로 사람을 살리는 약이 되어야만 문학이 문학이다.
문학인은 혼자서만 잘난 척 뻐기지 말아야 한다. 아는 척하지 말고 더구나 성스러운 척하지 말아야 한다. 독자 없이, 읽어주는 사람 없이 애당초 문학은 설 자리가 없다. 더구나 절망과 불안과 우울과 혐오와 증오를 문학에서 삼가야 한다. 축복과 응원과 사랑과 희망을 담기에도 문학의 그릇은 비좁다.
이러한 나의 망설임을 문학관 직원인 한동일 팀장과 안지연 대리에게 말했을 때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원장님, 지금처럼 하시면 됩니다. 방향을 바꾸지 마시고 지금처럼 많은 사람을 만나 문학과 인생을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도움을 주며 사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기로에 선 사람이 아니고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가야만 하는 사람인 것이다.
'성찰의 길' 계속해서 걸어갈 것
더불어 읽으십사 졸시 한 편 아래에 옮겨 적어본다. 이 시는 지난 10년 동안 내가 문학관에서 꽃과 나무를 심어 가꾸며 가진 생각이나 느낌 가운데 하나인데, 좋게만 생각되던 소나무가 끝내 좋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경험적인 고백을 담은 내용이다.
사철 푸르고 변함없음이 좋았다/ 기상이 맘에 들었다/ 우리 풀꽃문학관에도 그래서/ 소나무를 다섯 그루나 심었다/ 그러나 10년을 두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도무지 곁을 내주지 않는 나무였다/ 소나무 부근에 귀한 풀꽃을 심었는데/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는 거였다/ 두메양귀비, 하얀 할미꽃, 금낭화, 복수초/ 골고루 심었지만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야말로 혼자만의 고집, 독야청청이요/ 독선이었다/ 나는 이제 소나무에 대한 지지를 거두어들인다/ 그렇다고 나무를 뽑겠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지지를 거두어들이고 애정을 철회한다는 말이다. -나태주, ‘소나무에 대한 감상’ 전문